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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255

이혼남이 말하는 중년의 위기 (The Mid-life Crisis)

중년의 위기를 겪지 않는 사람을 매우 부럽게 생각한다. Mid-life Crisis라는 단어는 심심치 않게 미디어에 등장한다. 아침 드라마 따위에 등장하는 형태로, 혹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펀치라인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위기를 겪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늘상 똑같은 출근길에 어느 순간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그 느낌, 그렇다. 바로 그거 말이다. 당신이 월요일 아침마다 겪는 바로 그 것. 출근길 지하철에서 혹은 셔틀 버스에 오르면 바로 그 특유의 냄새가 있다. 딱히 좋다고 안 좋다고 하기에 애매한 그 냄새, 희망과 자조와 일종의 포기가 뒤섞인 그 냄새, 상큼한 섬유유연제 향기 사이로 느껴지는 기름에 절은 정수리와 결코 좋다고 할 수만은 없는 바로 그 '지난 주'의 냄새의 혼합물. 중년의 위기는 다름아닌 그..

생존기 2023.05.01

이혼남, 첫 월세를 받다. (feat. 아파트 공시지가)

이혼남의 계좌에 처음으로 월세가 입금되었다. 이게 무슨 기분일까. 좀 묘하긴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다. 일하지 않고 번 돈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흔히 월세를 처음 받았을 때의 기분을 묘사하는 '경제적 자유'를 부르짖는 유튜버들의 말처럼, 극적으로 좋은 기분이 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머리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월세를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월세로 생활이 가능해야 일단락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상당한 지출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직장인으로서가 아닌 나에게 교육비를 투자할 예정이고,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도 꽤나 지출을 했다. 분명히 거주비를 아낀 셈이지만, 그런 지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계좌의 잔액을 ..

생존기 2023.04.20

아빠임을 느끼는 순간

음악을 들으며 아이들을 떠올릴 때 아빠가 되었음을 느낀다. 연애 문제로 가장 힘들 때 의지했던 음악을 다시 들어보자, 그 가사를 들을 때 배우자나 옛 연인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이를 생각하는가? 가사 속의 '그대'가 내 짝이 아닌 아이들에 대한 것으로 들린다면, 심지어 아이가 성장해서 겪을 사랑과 그 아픔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이미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아빠다. 제과점이나 장난감 가게 앞에 무심코 서서 아이들을 생각하거나 선물을 고르고 있을 때 아빠가 되었음을 느낀다. 쇼핑 중에 발견한 레고 세트, 아이들이 그려진 디자인의 접시나 머그컵, 캐릭터가 올라간 케익, 주차된 차 안에 있는 카시트와 틀림없이 아이들이 먹고 버렸을 것 같은 캐러멜 포장지, 딸이 좋아하는 옆집 강아지와 아들이 좋아하는 자..

생존기 2023.04.16

이혼남의 구두 (feat. 자기 관리의 지표)

결혼식 당일 신으려고 준비한 구두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그 구두는 나와 다른 이들의 결혼식, 졸업식과 장례식을 두루 경험했다. 아이러닉하게도 결혼식장에 신고 들어갔던 이 한 쌍은 가정법원에서도 신었다. 이혼을 한 이후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게 남은 것들을 둘러보면서 고쳐나가는 일도 많아졌다. 이혼남의 구두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멋쟁이는 절대 아니었던 내게 검정색 구두만 두 켤레가 남아 있었다. 발이 커서 국내 기성화는 잘 맞지 않는터라, 미국산인 Rockport의 검정색 구두를 맞추었었다. 볼 너비와 발등 높이에 맞추어 기성화보다도 훨씬 길쭉한 신발 모양이 나온다. 10년 동안 잘 관리하지 않은 신발은 많이 낡았다. 신을 때 구두주걱을 쓰지 않고 몸무게로 그대로 눌러 신던 구두..

생존기 2023.03.26

이혼남의 직장 생활, 주당 52시간과 69시간 근무 사이

최대 69시간까지 근무를 허용하는 정책으로 말이 많은 모양이다. 52시간 근무는 적어도 대기업에서는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다니는 직장이 업계 1위는 아니지만 나도 곧 장기근속휴가가 나올 때가 되가니, 솔직히 대기업이 아닌 업무 환경에서 실제 근무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 얘기 하고 싶은 것은 근무 시간이 아니라,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혼남이 되기 몇년 전, 나는 뒤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직장인이었다. 뒤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유는 가방 끈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고, 그게 아주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쟁이 치열한 공채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회사'라는 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처음에 회사생활을 할 때 근무 시간의 기준은 주당 40시간 최소 근..

생존기 2023.03.12

왜 지금, 남자에게 향수인가.

향수에 투자하기로 했다. 좋은 향수를 싸게 사기 위해 가성비를 따져 알아보고, 온라인으로 여기저기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싼 곳에 찾아가서 시향을 해보고 구매하기로 했다. 내 느낌만으로 내 이미지를 대변할 수 있는 향을 찾아내기로 했다. 아마도 결혼할 때 이후 처음으로 나는 쇼핑이라는 걸 했다. 1층 매장에 들어서자 각종 향이 확 올라온다. 익숙한 향기도 있고, 새로운 향기도 있다. 시향지를 나누어 주는 직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한 편에서는 선글라스와 부츠를 알아보는 손님으로 가득하다. 내가 알고 있는 메이커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향들로부터는 일부러 멀어졌다. 잘 모르는 니치 향수들은 시향하지만, 구매를 고려하진 않는다. CREED 에서 멈춘다. 익히 알고..

생존기 2023.03.07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나의 딸과 아들에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말은 틀렸다. 이건 서로 다른 의견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분명히 틀렸고, 거짓말이다. 좋게 봐줘야 그건 도덕책에 나온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 말을 오해한 것에 불과하다. 아빠로서 너희들에게 절대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고 가르치지 않겠다. 안하무인으로 세상을 살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알라는 얘기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평등을 추구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라는 말은 사실 '(아주 제한적인 환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라는 말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버전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체화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에 불과하고, 이걸 실전에서 적용하려고 하..

딸과 아들에게 2023.03.05

어느 이혼남의 휴일 (feat. 689 White Wine, Napa Valley, 2020)

이혼을 결행한지 4년이 지났다. 4년의 절반을 심리 상담으로 보냈고, 얼마전 심리 상담을 졸업했다. 세상은 나한테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 4년간 일을 했고, 일을 하면서 시장의 소용돌이가 칠 때 다행스럽게도 나름대로 항해를 해나가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2023년 2월 이사도 마무리했고, 흔한 대기업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나 직장에서는 이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자정이 지난 시각, 나의 또다른 일터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가는 2호선 막차를 지켜보며 오늘 업무의 마감 내용을 생각해본다.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그래도 퇴근 후에 40분씩 걸어다녀야 했던 초기 사업장보다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2022년보다는 훨씬 관리되는 ..

생존기 2023.02.26

ChatGPT에게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라고 해봤다. (feat. 이혼소장)

확실히 유용한 툴이다. 다만 문제를 푸는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ChatGPT에게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고 했을 때 내게 내민 답장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말로 설명한 문제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문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LaTex 문법을 써서 수식을 입력하면 수식을 이해하는지 궁금해서 LaTex 알아 듣는지 확인했다. LaTex로 수식을 이해할 수 있다기에 다음과 같이 입력했다. 나는 질문을 하면서 이 질 문제가 페르마 정리라는 얘기를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굳이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라고 한 이유는, 수식의 예로 ChatGPT가 스스로 제시한 예시가 피타고라스의 정리였기 때문이다. 2를 n으로 고치기만 하면 되니까, 훨씬 쉽기 때문에. 내 질문의 의도..

생존기 2023.02.21

당신이 이혼남 생존일기 블로그에 상담을 요청하면 안 되는 이유

이혼남 생존일기에 상담을 신청하신 분들께, 이 글을 씁니다. 이혼남 생존일기 블로그에 이메일 주소를 등록하자, 제게 두 분이 이메일로 고민을 전해주셨습니다. 같은 상처를 가지고 고민을 해 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겪고 계시는 어려운 상황에서 지지와 조언을 구하는 좋은 방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정신 건강 전문가로부터 치료와 심리상담을 받으시길 권하며 두 분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일종의 고민 상담을 요청하셨는데 거절 드리는 것이 조금 매몰차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사연을 보내주신 분들 위해서나 저나 이 블로그를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상처받은 이를 상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객관적인 시각 '이혼 후 심리상담에 돈을 써라'..

생존기 2023.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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