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같이 살면 죽을 수도 있어서. 그게 내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나의 심장이 멈췄다.
저 멀리 하얀 불빛이 보이고,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따위 없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아들인 나는 병상에서 마지막까지의 모습을 지켜봤다. 주치의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당신께서 누워계시는 병상도 병실의 정식 병상이 아니라, 이미 움직일 준비가 다 끝난 임시 병상이었다. 요컨대 그 병상은 죽을 시간을 (Time of Death)를 기다리는, 임종을 지키는 가족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유언도 없었다. 그저 컨트롤이 사라진 몸에서 체액이 역류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의 심정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영적인 경험이나 죽어가는 이의 존엄성 같은 것은 없다. 죽음은 그냥 존엄하지 않다.
이제 곧 멈출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지켜야 하는 결혼은 없다.' 나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때가 나의 원점이 되었다. 나는 지금 '어쩌다가' 살아서 덤으로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봐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짐작컨대 이 경험이 없었다면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 같다. 갈등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기한 없는 별거로 이어지는 애매한 흐름에 결정이 늦어졌을 것 같다. 짐작컨대 이혼을 결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심장이 멈추는 충격은 마지막 말다툼이나 왜 이혼을 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토의 같은 것들은 삭제해버렸다. 내가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 이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죽는다.' 였으니까.
다시 한 번 나를 극한으로 몰아넣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초심을 마음에 새기고자, 벌써 몇 년전의 일을 되돌아본다. 수십초 동안의 죽음과 이혼을 돌아보는 것은 그렇게 건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몰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그렇게라도 찾아야만 하겠다. 그렇게할 만한 근거가 있느냐, 그렇게까지 해야하느냐라고 되묻는다.
근거가 있지. 방해가 되는 것들을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칠, 멀쩡하게 인쇄된 근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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