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수트 입은 이혼남 (주기적으로 수트를 입어야 하는 이유)

싱글맨 2024. 1. 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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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수트를 처음 입었던 것은 입사 면접이었던 것 같다. 면접은 단순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업계 특성상 화이트보드 인터뷰를 포함한 기술 면접이 있고, 임원 인터뷰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입사 3년전에 채용 프로세스를 시작해서 6개월, 1년 주기로 기술 세미나가 진행되서 때마다 수트를 차려입고 가다보니 버거웠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블랙 수트를 어설프게 입고 갈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가벼운 자켓에 평범한 셔츠도 충분한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면접때의 나처럼 사무실에서 옷을 입지 않는다.) 그 때도 살도 쪘었고, 근육 운동은 안해서 옷매무새가 볼품 없었다.

제대로 된 수트를 새로 맞춘 것은 결혼식을 준비하면서였다. 그 때도 블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블랙이 오히려 내 피부톤 때문에 나이들어보이게 한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이미지'에 대해서 나는 완전히 무지했다. 나의 몸을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3년을 돌이켜보면, 가장 큰 개인적인 변화는 나의 몸을 알고 내 이미지를 혁신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네이비 블레이저는 수트가 아니다. 수트는 바지와 일치하는 옷감으로, 세트로 제작되어 한 벌로 입는 것을 지칭한다. 생각보다 일찍 필요하게 될 것 같아서 조금은 무리를 해서 수트서플라이 (Suit Supply) 에서 차콜그레이 수트를 한 벌 맞췄다. 수트서플라이 한남동 플래그십스토어를 방문했던 게 지난 봄이니, 벌써 9개월이 되었다. 

이혼남의 수트

수트 서플라이에서 가장 고가의 라인은 아니지만, 200만원 이하 선에서 한 벌을 장만할 수 있었다. 이 수트는 (예상 외로 많았던) 2023년의 결혼식 참석이나 은행을 갈 때 매우 요긴하게 입었다. 결혼식 당일 입었던 블랙 수트가 10년전 가격으로 청담동에서 250만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가성비라고 생각한다. 커스텀으로 제작하는 것보다 간단한 과정을 거쳐서 3주 정도 기다리면 입을 수 있다. 물론 중간에 한 번 정도 방문해서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켓을 몸에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바지 핏을 잡는 것은 오래 걸렸다. 어떤 옷을 입어도 남자는 신발의 선택과 바지 핏을 잡는 것이 기본인데, 가장 어렵다.

한 가지 후회되는 것은 첫 수트부터 너무 과감하게 질러서 더블브레스티드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결혼식에 갈 때는 전혀 상관 없지만, 비즈니스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과한 감이 있다. 네이비 싱글브레스티드가 첫 수트로는 더 좋은 선택이고, 사실 이것이 내가 별도로 브룩스브라더스에서 네이비 블레이저를 구매했던 이유다. 그나마 내 어깨가 좀 있어서 피크드 라펠 (Peaked Lapel) 이 소화가 되는 것이지, 어깨가 조금만 작았다면 오버였을 것 같다. 이 지점에서, 한 벌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한 달에 두 번은 수트를 입는 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0대 이상이라면, 이혼남이라면 더더욱. 왜냐하면 내가 '주기적으로' 수트를 입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의미 있는 '규칙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명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미지를 투사할 필요나 기회가 있는 모임에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은행을 오프라인으로 방문해야 할 때는 무조건 수트나 블레이저를 입는다. 수트를 입었다고 한도 이상의 돈을 빌릴 수는 없지만, 대출을 집행하는 은행 담당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태를 방지할 수는 있다. 수트를 입는 것이 습관이 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지도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날, 수트를 입고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두 명 뿐이었다. 그만큼  IT 업계나 학계에서 생각보다 풀 수트를 입는 것이 드문 일이다. 굳이 업계를 따지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수트를 많이 입지 않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수트를 챙겨 입는 것만으로 나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그 효과를 톡톡히 본 날이 지난 12월 동문회 자리였다. 나보다 선배들중에 수트를 입지 않고 온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직업적인 이유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트를 입은 사람들끼리 더 쉽게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어찌보면 수트는 입고 싶어서 입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입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영화에서 그랬듯이 수트는 현대의 갑옷 (Armor) 이다. 전쟁터에서는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심각한 상황에 끼워주지 않는다. 전쟁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온 사람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주기적으로 무장하지 않는 남자는 초라해지기 쉽다. 40대 이상의 이혼남이 수트를 입을 일이 없다면, 비즈니스도 없고 사회 생활도 없는 일상을 보낸다는 뜻이 된다. 그 엔딩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열심히 일하느라 수트 따위 입을 일이 없다는 항변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40대 이상의 사회에서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개인적으로 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없다는게 종국에 발목을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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