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2024년, 무조건 종이 다이어리를 써야 하는 이유

싱글맨 2024. 2. 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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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으로 일정을 관리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했다. Notion이니, Flow니, Evernote 같은 것으로 어떻게 해보려던 모든 시도를 포기했다. 구글 캘린더도 쓰지 않는다. 심지어 아틀라시안의 제품도 써보려고 했으나 다 집어치웠다. 내 선택은 그냥 스타벅스 다이어리다. 

스타벅스 다이어리 2024, 브라운

앱으로 뭔가를 계획하다보면 화면을 통해 보이는 문서를 예쁘게 꾸미는데 자꾸 집중하게 된다. 내 손 안에 들어갔을 때, 뭔가를 장악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한 달의 4주 혹은 5주가 원래 설정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고,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옮길 수 있어야 하는데, 의외로 앱을 사용하면 그렇지가 못하다. 충전이 부족하거나, 태블릿의 블루투스 키보드가 뭔가 마땅치 않아, 정작 내 생각을 빠르게 옮길 수가 없다. 

2024년 한 해를 계획하는 일은 이미 지난 11월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지금 내 사무실 벽 한 쪽에는 월별로 예상되는 일과 대략적인 계획이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이제 입춘이 지난 시점, 음력으로 곧 갑진년이 시작되려는 이 때, 그 어느 때보다 내 다이어리는 지저분하다. 좋은 일이다. 다이어리가 깨끗하다는 것은 정신줄 놓고 흘러가는대로 살았다는 뜻이니까. 

흰 종이가 검어져야 한다.

이혼 후 지난 5년 다이어리를 쓰면서도 앱으로 뭔가를 화려하게 해보겠다는 생각에, 정작 다이어리는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저런 자동화와 알람 기능을 써서 멀티태스킹을 해보려고 하다가 늘 여름쯤 포기하곤 했다. 봄은 황사에 꽃가루때문에, 여름엔 덥고, 가을엔 추석때문에, 겨울엔 춥고 눈이 와서...정신줄을 놓아버릴 핑계는 많다. 내 정신은 그렇게 앱과 다이어리, 그리고 구글 캘린더에 흩어져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흩어졌었다. 늘 비어 있는 다이어리의 페이지가 나중에 문제의 상징처럼 남았다. 2024년 계획을 세우면서 그건 바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드카피로 기록된다. 이미 기록된 것을 구체화하고 압축해서 정리하는 것은 웹브라우저와 협업툴로 훌륭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의 계획 실행은 다르다. 

학부 졸업 이후에 늘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데 실패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원했던 대로 얌전히 흘러가는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계획과 실행이란 늘 바뀌는 것이다. 전화기를 꺼내 화면을 풀고 앱을 실행시켜 좁디 좁은 터치패드를 조작하여 뭔가를 입력하는 것보다 펜으로 휘갈겨 쓰는 것이 훨씬 빠르다.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일정이나 전술이 바뀌는 지점은 그냥 색깔 있는 볼펜으로 크게 X 가위표를 그어 버리면 그만이다. 

지난 날짜의 페이지 빈 칸에 뭔가 간단한 감상이나 일기를 적을 수 있다는 것도 감정적으로 보탬이 된다. 디지털화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쌓아 놓은 데이터를 다시 분석하거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올 한 해 종이로된 다이어리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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