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연말 모임 단상 part I (feat. 동문회, 남자의 쓸모와 네트워크)

싱글맨 2023. 12. 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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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동문회를 무려 5년만에 나가게 되면서, 나는 동문회를 비롯한 사회적인 모임들에 대한 내 생각이 틀렸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파악한 동문회의 모습이나 성격이 틀린게 아니라, 그렇게 알아차린 동문회에 대한 나의 판단이 틀렸다. 심지어 내가 대학별 고등학교 동문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동문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20대에 겪었던 동문회장으로서의 경험이 그랬기 때문이다. 결국은 저녁식사와 2차 술자리를 예약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고, 어떻게 하면 여학교 동문회와 조인트 동문회를 잘 여는지가 동문회장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기 떄문이다. 소위 '동문회'라는 건 잘해야 '나중에 나이들어서 나눠먹기 잘 하는 조직' 이고, 최악의 경우 조인트 동문회에서 작업걸다가 술에 떡이 된 동문들 뒤치다꺼리만 남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20대때 했던 저 판단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사실 매우 정확했다. 문제는 내가 '나눠먹기'의 힘을 무시했다는데 있다. 동문회에서 받아온 무수한 명함들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무려 50장이 넘는다. 

명함이 아직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가?

남자는 '쓸모'로 평가받고, '쓸모'로 다른 남자를 평가한다. 남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일은 도움을 주고 받기 위한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절친이라고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의 쓸모를 전혀 따지지 않는 것이 건강한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처먹기나 하는 모임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사람을 과거로 끌어내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동문회에 나와서 서로의 명함을 교환하는 일은 누군가에겐 영업이고, 누군가에겐 자랑이며, 누군가에겐 도움을 청하려는 급박한 몸부림이다. 남자가 30대가 지나고,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보면,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막 군대를 제대한 나는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은, 정복하려면 한 사람 이상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 속에서 혼자 사냥하는 호랑이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이리나 단체로 영역을 지배하는 사자가 될 필요가 생긴다. 

무리의 힘을 이용하려면 그 무리를 위해 나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점부터 남자는 그 무리의 네트워크 안팎으로 가진 힘으로 평가받는다. 나의 쓸모가 이 네트워크에서 어떤 도움이 되는가, 이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슬프지만 나눠먹기 없이) 혼자 성공하는 남자는 없다. 그래서 리더십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리더십은 내가 리더가 되는 상황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전체를 위해 내가 어떤 리더를 따라야 하는 상황에도 해당한다. 영화 존윅에 나오는 'I will serve, I will be of service.' 라는 대사의 심각성을 30대 이전의 청년이 정확하게 파악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영화 존윅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에서 다룰 예정이다.)

'나눠먹기'가 야합이라고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나눠먹기는 성공적인 사회생활의 조건이다. 받은 명함중에 변호나 검사의 명함이 있다면, 만약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경우 직접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 법조인에게 직접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정확한 상담을 받고 전문가를 추천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혹시나 동종업계나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선후배가 있다면, 나나 당신이 투자자가 될 수도 있다. 어딘가 아프거나 꽤나 큰 시술이나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의사 동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내가 받은 명함들에 홈페이지 주소가 있으면, 남김없이 웹페이지를 확인한다. (심지어 유튜브 구독과 좋아요를 요청받은 적도 있다.) 법조인의 경우 변호사 협회에서 검색하면 전문 분야를 금방 알 수 있고, 검사나 판사들은 법조계 언론사의 인사 발령 기사가 검색되기 마련이다. 의사도 병원 웹사이트를 통해 쉽게 검색이 된다.

남자의 평판은 네트워크 안팎의 쓸모에 따라 결정된다. 이건 그냥 사실이다. 당신이 사회를 피하고 싶어도, 사회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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