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격리 단상, 또다시

싱글맨 2022. 9. 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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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확진과 동시에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추석 명절 연휴에 아이들과 만나는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다. 아들 녀석은 이제 아빠를 영상으로만 만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직은 누나처럼 말과 영상으로만 인사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빠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예전처럼 길게 영상통화를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맘에 안들면 중간에 영상통화를 끊어버리는 일이 더 늘었다. 그건 아빠가 맘에 안 드는 것보다, 그 상황이 맘에 안 드는 것이 더 작용하는 것 같다. 나도 머리로 그런 이유로 일찍 전화를 끊었나보다라고 이해는 하지만, 격리된 채 창밖으로 다른 집 어린이들이 부모들과 놀러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자면 가슴 한 쪽이 와르르 무너진다. 

3년째 마스크를 쓰고 있다.

병력이 있어서 백신과는 거리가 먼 몸이지만, 한 번 이상 확진되고 3년째 방역 상황하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이 병이 나를 죽일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전염병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몸이라는 자신감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완전한 무증상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엔 호흡기 증상이 꽤 동반된다. 여전히 조심스럽게 대응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이 병을 옮기는 아빠가 되고 싶지도 않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시절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연휴 전의 훌륭한 가을 날씨는 연휴 내내 즐길 수 없었다. 오락가락 비가 오기도 했고, 날씨는 흐렸으며, 맑은 날은 또 은근히 더워 이상하리만큼 쉬면서도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는 그런 날들이 많았다. 으레 긴 휴일 동안 다 쉬고 놀면 마음 한 켠에 드는 죄책감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아직 식은땀이 나는 걸로 봐서, 몸은 내게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추석 당일부터 애써 뭔가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생각해보면, 뭔가를 했다고 해서 특별한 일을 많이 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연휴 기간동안 대내외적으로 많은 것들이 끝장났다. 세상은 더 간단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취직을 해서 밥벌이를 하고 22년에 이직을 하겠다던 나의 생각은 완전히 끝이 났다. 금융위기 이후의 저금리와 자산 시장의 팽창도 그 기조가 바뀌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도 모두 바뀌었다. 내가 학생이던 90년대-2000년대 초반의 가치관은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갔다. 4인 가족의 신화가 끝장났다. 부모님 세대의 노후 대비 재정이 드러나면서 그들의 한계도 명확해졌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의 이유로 그 한계를 드러냈다. 그들이 가진 학위, 평판, 능력의 이면이 드러났다. 친분관계도 모두 새로 쓰였다. 오히려 가벼운 관계를 오래 지속해온 사람들이 살아남고, 함께 일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가까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와 멀어졌다. 이혼으로 부부 관계를 끝낸 것은 이런 자연스러운 이행기의 과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70년간 영연방의 수장으로 군림해왔던 여왕의 서거는 마치 끝장난 지난 10년 동안의 세계를 구분짓는 마커처럼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제 살아남은 자들은 새롭게 일을 하게 될 텐데, 그건 이제 20대 시절의 의기투합만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수준 이상을 요구한다. 나든 다른 사람이든 움직이려면 그렇게 함으로써 철저히 이익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관계가 된다. 이건 생각해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40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도 나도 점점 쌓아가면서 발전하지 않는다. 어릴 땐 그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아는 것들과 아는 사람들을 점점 많이 만들다보면 내가 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을 쓰레기통속에 처넣으며, 오로지 새롭게 변하면서 발전한다. 

손바닥의 굳은 살을 보면서 같은 생각이 든다. 처음에 뭔가 익숙해질 때 생겼던 굳은 살들은 숙련도가 올라가면서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혹시 그 일을 더 이상하지 않거나 반대로 아주 숙련도가 올라가면 그 굳은 살은 거의 사라진다. 하지만, 진짜 그 굳은 살이 없어지고 불편함이 사라지는 시기는 굳은 살이 없어지는 때가 아니라, 과거의 굳은 살이 새로운 굳은 살로 바뀔 때다. 과거의 노력과 노하우와 결과물은 그렇게 두꺼워지거나 얇아진 피부 아래로 들어간다. 그리고 새로운 것과 마주하면서 그 경험은 굳은 살이 아닌 나의 피부인 것처럼 손을 놀리는데 사용된다. 굳은 살은 이제 굳은 살이었던 거 자체를 잊은 것처럼 나의 일부분이 된다. 

이 이상하지만 당연한, 조금은 복잡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할 수 있을까. 이걸 말로 한다고 이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들에게 나의 생존에 대해서 내맘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나의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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