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선물로 받아 타게 되면서 처음에는 신나했지만, 조금씩 혼란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았는데 어디로 갈지를 모르니 자전거 안장 위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들과 놀아주는 테크닉은 아빠도 분명히 훈련이 필요하다.
처음 아이에게 너 가고 싶은 곳으로 맘대로 가보자라고 하면, 그 반응은 아이들마다 다르게 나온다. 아들보다 어리면서도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잘 노는 녀석들을 보면, 일단 주행 자체가 목적인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는 도로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목적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나의 두 아이들은 조금 다르다. 둘다 목적지가 있고, 거기까지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탄다는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목적의식이 분명한지는 나도 모르겠다. 두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에너지 사용은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는 점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행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 아들에게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아빠가 따라가겠다라고 하면,
"저기는 뭐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여기는 길이 없는 것 같아."
"저기 아까 나를 놀렸던 애들이 있어, 반대 방향으로 갈래, 그런데 반대 방향엔 길이 없는 것 같아."
"아빠 집으로 다시 갈래, 그런데 저 길로 가면 아빠 집이 나올까?"
이 녀석은 이렇게 자전거 안장 위에서 길을 잃었다. 그런데 아빠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란다. 심지어 사진 속에서 처럼 아빠는 절대로 자전거 앞에 서 있지 않고 한 발 뒤에 따라온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지?
최근에 날씨가 덥거나 비가 많이 오기도 했지만, 자전거를 생각보다 많이 타지 않은 이유는 행선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누나와 더 이상 자전거를 함께 타지 않는다는 것도 작용했다. 이 녀석도 누나와 본인의 행선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 같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서 길을 고민하다가 10분만에 다시 들어오기 일쑤였다.
아빠인 내 입장에서는 아들이 길을 모르더라도 충분히 자전거를 타고 길을 찾아보길 바랬다. 직접 그렇게 얘기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저긴 뭐가 있는지 가볼까라고 묻는 것만으로는 '효율을 중시하는' 녀석을 움직일 수 없었다. 수확은 있었다. 아이들의 성향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와 그걸 달성하는데 이 아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게 되었다. 두 아이들 모두 처음이 조심스러운 성향이다. 그리고 딸보다 아들이 더 보수적이다. 아들에게 신뢰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어쩌면 또래 아이들보다 더. 아빠 입장에서 아들이 더 자전거와 친해지게 하려면 뭔가 전략의 수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난 뛰기 시작했다. 뒤어 서서 네가 가는 곳으로 아빠가 따라 가겠다라는 태도가 아니라, 아빠가 앞장서서 전격적으로 뛰어다니는 전략이 필요했다. 표정부터 바꿔야 했다. 뒤에서 너의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근엄한 아빠가 아니라, 앞에서 아들보다 신나게 뛰는 웃는 아빠가 필요하다. 나는 아예 운동을 할 생각으로 앞장서서 뛰었다.
그제서야 아들에게 행선지가 생겼다. 나를 따라 힘껏 페달을 밟는 녀석은 나와 함께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기도 하고, 오르막갈에서 아빠가 등을 밀어주는 상태에서 힘겨운 경사에서도 페달을 열심히 돌렸다. 왜 핸들을 좌우 끝까지 꺾으면서 선회를 하면 안 되는지 가르쳤다. 핸들을 꺾은 반대방향으로 넘어질 수도 있다는 걸 몸으로 가르쳐주자 반응하기 시작했다. 길이 없는 것 같은 길을 아빠가 들어가자, 녀석은 드디어 나를 따라 탐험을 시작했다.
마침내 이 녀석은 스스로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아파트 단지의 조경을 보면서 나무와 꽃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이름표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쥐똥나무, 영산홍, 회양목 같은 이름들을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들 녀석에게는 뭔가 주행 이상의 목적이 필요했다. 자전거는 이름표를 읽어 식물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지, 자전거의 주행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식물의 이름들을 크게 읽기 시작했다. 웃기는 식물 이름이 나올 때마다 웃었다.
역시 네게 아빠가 몸으로 놀아주는 것이 필요했구나. 아빠가 얼마든지 달려주마. 그리고 이제 알겠다. 아빠가 네게 세상을 해석해줄 필요는 없지만 함께 세상을 둘러볼 필요는 있다는 걸 말이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 원하지 않는 때가 아니라면, 너에게 얼마든지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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