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부부 공동명의 통장보다 중요한 것

싱글맨 2022. 1. 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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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부부 공동명의의 통장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2012, 2013년 경에 생겼다. 이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이 즈음이 결혼 전후로 공동명의의 통장을 알아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 당시에는 만들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의 공동명의 통장은 인출을 하려면 양자간의 동의가 필요한 계좌가 기본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너무 불편했다. 실질적으로 한 사람이 관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특징은 미국에서의 부부 공동명의 계좌 (Couples' Joint Bank Account)와는 다르다. 부부가 서로의 허락이 없이 수표를 쓰는 것, 즉 당좌수표의 발행(Joint Checking Account)이 가능하다. 이런 차이는 미국과 한국에서 부부의 법적 지위를 다르게 다루기 때문인데, 쉽게 말해서 미국은 부부를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보고, 대한민국의 민법은 부부여도 각각의 개별적인 권리를 (적어도 계좌개설에 있어서만큼은) 미국보다 강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양자간에 뭐가 더 좋고 나쁘고는 없다. 그냥 양국의 법철학이 다를 뿐이다. 


그 이후에 한국에서도 부부 모두 체크카드 발급이 가능한 공동명의 계좌가 만들어지고 서비스가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금융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른다. 그런 디테일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부부는 공동명의의 계좌를 개설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질문이다. 

그렇다면 뭘 준비해야 하는가? 뭐 준비해야할 서류는 당연히 있을 터,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공동명의의 계좌를 만들기 전에 부부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부부로서 두 사람이 공통의 삶의 목표, 재무적 목표와 투자에 대한 태도를 공유하는 것이다. 

당장 공동명의의 계좌가 만들어지면 입금도 출금도 각각 할 수 있다. 양 쪽 모두 입금과 출금의 빈도와 크기가 적당하고 비슷하다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문제는 꼭 한 쪽이 입금하면, 한 쪽이 출금을 하거나 서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생기거나, 전혀 다른 재무적 목표를 가지고 공동명의의 계좌를 운용할 때 발생한다. 

당장 공동명의의 계좌를 갖는다는 것은, 내가 입금한 돈을 다른 사람이 허락없이 출금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이다. 공동명의자를 완전히 신뢰할 경우에 가능하다. 효과적인 저축을 하기 위해 통장을 쪼개서 쓰게 되겠지만, 출금 내역에 대해서 파악이 안 되는 상황에서의 공동명의 계좌 운용은 사실 위험하다. 아마 가장 흔한 상황이 입금되는 돈은 있는데, 출금되는 돈의 용처가 불분명하고, 월말에는 돈이 모자라는 경우다. 나는 공동명의 계좌는 쓰지 않았지만,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한 달에 어떤 돈이 어떻게 나가는지 대충 이 비용이 이 정도고, 저 비용이 저 정도고 하는 수준으로 대충 비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재무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항상 돈이 비는 것은 짜투리 돈과 우수리 때문이니까.

어디서 배운 신공인지는 모르지만, 내 전 배우자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생활비 통장을 삼았다. 이혼하면서 이걸 알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황당했다. 이것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서 연체를 막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으로 생활비 통장을 쓰고 버는 돈으로 채워 넣는 접근방법을 이해한다고 쳐도, 이 방법은 남에게 먼저 지불하고 나에게 가장 나중에 남기는 방식을 취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전 배우자에게 남편 따위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이건 부부 공동계좌가 아니라 자기가 판 마이너스 통장이니까. 당연히 이런 방식의 생활비 계좌 운용을 나에게 동의를 구한 적도 없다.

단순히 생활비 수지를 맞추는 정도라면 공동명의 계좌의 장점도 있을 수는 있다. 누가 얼마나 입금했는지는 기록에 남을 테니까. 하지만 부부의 공동명의 계좌에 투자가 얽히기 시작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어떤 투자를 얼마나 하는지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이 없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서로 얼마만큼의 잉여금을 저축하고 투자하는데 사용하는지 합의를 해야하는데, 부부 공동명의 계좌를 만들기 전에 이런 부분들은 합의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의 투자 성향이 다를 경우 부부는 파국행을 이미 예약한 것이나 다름 없다. 부부 둘 중 한 명은 완전히 공격투자형이고, 다른 한 쪽은 보수적이라거나, 한 쪽은 주식 위주의 운용에 익숙한데, 다른 사람이 부동산이나 정기예금만 굴려본 사람이라면, 혹은 그 반대라면 이제 남은 돈을 어떻게 쓰는지 갈등이 시작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돈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결혼하면 사랑같은 건 순위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래서 남편 몰래 집 샀다가 팔았어요, 아내 몰래 주식했다가 깡통 찼어요가 나온다. 부부의 공통경제관과 재무적 목표와 운용방식에 대한 합의를 안한 상태에서 부부 공동명의 계좌부터 만든 사람이 각자 남는 돈을 신경써서 모니터링 할 리가 없다.

가계 재무제표까지는 기대도 안 한다. 그건 같은 방향을 보면서 공통의 경제관으로 무장한 부부는 자연스럽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게 되지 않을까. 가정경제 운용의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합의 문제는 사실 공동명의의 계좌 개설 여부가 아니라, 애초에 결혼 결정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가 된다. 비슷한 경제관념이 공유가 안 된다면 사실 애초에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결혼과 이혼을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전 부모님 세대가 비슷한 수준의 집안과 결혼을 권했던 이유는 단순히 생활 수준을 넘어서 다른 배경 집안의 두 사람이 비슷한 경제관을 가지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 같다. 

마지막 관문이 하나 남았다. 가정경제에 대한 원만한 합의를 마치면 공동명의 계좌를 개설한 준비가 된 것 같지만, 인증서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구 공인인증서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돈을 맡겼다가 낭패를 본 사람으로서 이 문제의 중요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구 공인인증서는 공동인증서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다양한 금융 기관이나 포털이 금융인증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인증서 체계를 통일해야 한다. 공동명의 계좌 개설보다 이 점이 더 중요하다. 각자의 계좌로 돈을 운용하더라도, 부부 두 사람의 계좌에 양 쪽 모두가 투명하게 접근할 수 있으면 가정을 원만하게 꾸려갈 수 있다. 카카오페이 인증서로 할 것 인지, 아니면 급여 계좌를 제공하는 금융기관의 금융인증서를 쓸 것인지 결정하고 두 사람 모두 두 사람 모두의 인증수단과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부부별산제를 채택한다."


재정상 물리적 결합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 부부공동명의 계좌로 어설픈 재정상 화학적 결합을 했다가 한 쪽 혹은 양쪽이 피를 보는 상황은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예외는 있다. 양 쪽 모두 각자 결혼 즈음해서 경제적 자유를 달성한 상황이라 각자 돈을 관리해도 결혼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물리적인 결합만으로 살면 된다. 하지만 은근히 대한민국에서 서로의 자산 상황을 알아야 하는 경우는 생긴다. 당장 종부세 문제만 해도 부부 공동명의 주택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부별산제를 채택하는 나라에서 부부를 세대로 규정해 애매한 법적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혜택을 부여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주택 보유 상황과 빚의 크기를 알아야 하고 주식 세금을 내려면 어떤 종목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혼을 할 경우 공동명의로 되어 있는 모든 부동산과 현금은 재산분할의 대상이고 이혼소송을 할 경우 전부 다툼의 대상이 된다.

당신(들)의 무사생존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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