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들어 뒤늦은 이혼이나 졸혼이나, 용어를 뭘로 쓰던지 결과는 같다.
기혼자는 쉽게 공감할 내용이지만, 남녀가 서로 같은 방과 같은 침대를 쓰면서 길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육아때문에 시작한 각방이나 거실살이는 고착화된다. 그리고 한 번 멀어진 거리는 그 원인이 사라져도 다시 복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혼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부의 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기로 했다.', '서로 원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여러가지 문장으로 그걸 표현하지만, 결과는 비슷한 모양이다.
정년퇴직도 마찬가지. 남녀간의 관계가 노동자와 회사의 관계로 치환되었을 뿐, 같은 현상이다.
직장인은 역시 공감하겠지만, 직장인은 언젠가 회사를 떠나야 한다. 이건 결혼보다 더 법적인 관계이이므로 회사를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로 확정되어 있다. 3년이 지나 사람과 조직문화에 치이기 시작하면 회사생활에 대한 회의감과 이직에 대한 욕구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회사로부터 떠난 마음은 회사 생활이 조금 나아져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직이나 퇴직을 하지 않더라도 직장인과 회사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5년 이상 근속기간이 지나면 이제는 회사가 그만 나가주었으면 하는 경우도 있다. 직장인과 회사의 관계도 여러가지 이유로 점점 멀어진다. '제 2의 인생을 응원한다.',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 같은 미사여구를 쓰지만, 역시 결과는 비슷한 모양이다.
식은 라면 냄비가 이유없이 다시 끓어 오르는 이유는 없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황혼이혼은 이제 삶의 중장년기를 다 지나 노년에 이르러 이혼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지 정확한 데이터까지는 잘 모른다. 짐작컨대 나 이전의 세대, 부모님 세대의 부부생활 특성상 아마도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황혼이혼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재산분할과 이혼의 내용이 소송감인 경우 위자료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녀들이 있다면 장성한 경우가 많으니 양육비는 없다고 하더라도, 헤어진 두 사람이 이혼 후 독립하는 모든 과정은 똑같다. 30-40대에 이혼하는 경우와 입장은 다르겠지만, 그게 반드시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의 이혼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정년퇴직은 직장생활의 중장년기를 지나 60세 내외에 이르러 법적 정년을 채우고 은퇴하는 것이다. 정년퇴직은 반드시 회사가 요구한다. 하지만 정년퇴직의 모습이 일찍 퇴사하는 것과 벌어지는 현상 자체가 다르지는 않다. '개인용품과 퇴직금을 챙겨 회사 건물에서 나간다.' 이 역시 퇴사 이후 독립하는 과정은 모두 똑같다.
몇 년전 입사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첫 출근을 하기 전에 나는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혼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2022년은 내가 퇴사하거나 이직을 해야하는 시기였다. 좀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직 대응할 수 있는 수단들이 있고, 계획에 변경이 생겼을 뿐 차질이 생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혼하기 1년전부터 나는 직감적으로 이혼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선을 넘었다' 라고 생각되는 Deal Breaker들이 결혼생활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만큼 퇴직과 이혼을 잘 대비했다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황혼이혼과 정년퇴직의 공통점:
1. 기본적으로 예속상태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황혼이혼과 정년퇴직 모두 양 쪽 당사자중 하나, 혹은 둘 다 계약으로부터 해방된다. 둘 다 모두 독립이 필요한 일이고, 자유의 댓가는 비싸다. 연말정산 정도나 챙겨봤던 사람이 퇴사 후에 투자된 자본을 가지고 은퇴생활을 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다. 집안 청소나 자신의 건강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현금 흐름을 한 번도 면멀히 따져보지 않은 사람이 이혼이나 퇴직 이후의 삶을 갑자기 잘 설계하는 것은 확률이 아주 떨어진다. 넓은 인맥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지지기반과 주변인과의 관계 정립이 되어야 한다.
2. 이미 예정된 일이고, 잘 했던 사람도 피할 수 없다.
황혼이혼이나 정년퇴직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직감하고 있다. 다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이 겁이 나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 되어 있고, 혼자 생활이 익숙하지 않으며, 아이들과의 관계 설정에 고민만 앞서고, 인생이 공허해진 것 같은데 감정을 다스릴 줄 모른다. 아마 이 네 가지가 당신이 결행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심지어 파국을 예상하고 있더라도. 회사 생활을 나름대로 잘했던 사람이 정년퇴직을 맞이하고, 결혼생활을 잘 했던 사람들도 각자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3.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혹독한 댓가를 요구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래서 저항한다. 혼자 식사를 해결할 줄 몰라서 죽어도 이혼을 안하겠다, 아이들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 같은 항변이나 핑계가 그래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는 '내가 이 회사에서 몇 년을 뼈빠지게 일했는데' 같은 자괴감과 원망섞인 퇴사의 변과 궤를 같이 한다. 진정 이렇게 될 줄 몰랐는가, 몰랐다면 그건 모른 당신의 죄다. 당신 몸무게만큼의 준비는 당신 책임이기 때문이다.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은 굳이 따로 독립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충분치 않거나 예측불허의 상황은 발생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최악의 상황은 피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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