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남이 미니멀리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혼남은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수 있는 적임자다. 미니멀리즘이 항상 최선은 아니고, 여러가지 이유로 가족을 챙겨야 하는 집에서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시간과 공간, 생활의 미니멀리즘에 이혼남만큼 최적인 사람이 있을까. (비싼 댓가가 따르지만)

침실에선 잠을 잔다.

미니멀리즘은 그냥 '단순하게' 사는 거다. 단순무식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위해 고도로 최적화된 단순함을 가질 수 있다. 잠을 잔다. 일을 한다. 돈을 번다. 같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나의 시간과 공간을 오롯이 쓸 수 있다. 철저하게 일하는 공간과 쉬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고, 사회생활을 위한 시간과 개인적인 시간이 분리되어 있다. 

사실 내가 미니멀리즘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목표를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사람과 소통하는 스마트폰도 정해져 있다. 나는 그 폰을 주로 주말에만 집으로 가지고 온다. 일은 철저하게 회사에 머무른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도 정해져 있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시공간이 비어 있게 되니 그닥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만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이 시간을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하는데 쓸 수 있다. 단점이 있어도 이걸 장점으로 만드는게 아빠로서 내가 할 일이다. 내 침실은 침대와 서랍장 정도를 제외하면 텅비어 있다. 잘 때는 자는 것만 한다. 그냥 쉰다. 그렇게 쉬어도 짧은 시간이다. 

안방

내 안방은 거의 비어 있다. 가끔 책이 뒹굴기도 하지만, 여기선 정말 쉬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안방에 머리카락이 떨어져도 다 나의 것이다. 이 방 안에 내 책임이 아닌 것도 내가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없다. 빈 방이 미니멀리즘을 다 보여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시간의 토막마다 내가 집중할 수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제 이 집에 다른 세입자를 들이고 나가지만, 내가 세입자로 이사를 가는 집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침대와 에어컨, 서랍장과 아령 하나 정도가 내가 방에 가지고 있는 물건의 전부다. 다른 공간도 이것과 비슷하다. 거실에는 아이들이 볼 수 있는 티비와 소파 정도가 있고, 주방에는 식탁이 있다. 화장실에 수건과 면도기 정도가 있다. 이사를 나가는 것은 아이들과 나에게는 조금 감정적인 일이지만, 생활은 목적을 위해 굴러간다. 그래서 그건 여정 따위가 아니라, 뭔가를 이뤄내는 과정이다. 

이번에 이사를 가면서 옷은 또 절반 정도를 버릴 계획이다.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있다. 사실 누군가에게 잘 보일 일도 없다. 내가 패션에 신경을 쓰는 건 아빠가 검정색 옷을 입는게 싫다고 하는 아들을 위해 노란색과 파란색 티셔츠를 갖추어 놓는 정도의 일이다. 출근할 때 나는 붉은색 셔츠를 입고, 내 일을 할 땐 검정색 옷을 입는다. 가디건 하나, 코트 둘, 패딩 하나. 티셔츠 10개, 양말 10개. 지난 2년 동안 이 집에 살면서 니트를 딱 두번 입었고, 반바지를 두 번 입었다. 입었던 니트 한 장을 빼고 이사하기 전에 모두 버릴 생각이다.

이혼남이 미니멀리즘을 선택하면 결혼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잡념을 태워 없앨 수 있다. 주말에 집에서 스트레스 받고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회사에서 쉬는 생활, 본가와 처가의 말도 안 되는 상황극도 안녕이다. 복잡했던 인간 관계나 애매한 이성 관계도 없다. 집에는 나와 맨몸운동만 있다. (난 흔한 게임도 취향이 아니어서 하지 않는다.) 나는 일과 투자를 생각하고, 가끔 고개를 들어 창문밖을 보도가 아이들을 생각한다. 시간을 최적화해서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 

나는 이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생활을 종료하고 나서 일종의 디톡스랄까. 나는 어떤 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방해요인이 많으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그러면 나는 뭔가를 하고 있어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멀티태스킹을 할 땐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하는데, 누가 방해하면 나는 멀티태스킹을 잘 할 수 없었다. 이혼을 하고 나서,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이혼 이후에 모든 일이 다 잘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예전에 스쳐 지나가게 놔두던 생활의 변화를 다시 민감하게 감지해낼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