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세트를 들여놓은 이후로 아들은 늘 '모두의 마블'을 탐냈었다. 이전 글 중에 아이들에게 소고기를 한 번 먹이는 것보다 보드게임류가 교육적으로 훨씬 의미가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우연한 기회로 손에 넣은 30만원 상당의 게임은 실질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스플렌더 같은 다른 게임은 아직 규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냥 예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수준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마블은 좀 달랐다. 규칙 없이 플레이를 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지만, 별 이유 없이 그냥 한 번 규칙을 가르쳐봤다.
지금까지 규칙을 대충 알려주고 두 번 아들 녀석과 일대일로 게임을 했지만, 단 한번도 이 미운 다섯 살을 이기지 못했다.

이 녀석은 아직 주사위 숫자가 큰게 나오면 나를 쳐다본다. 내가 얼마가 나왔는지를 알려주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주사위를 '하나 둘 셋...' 하며 눈을 세어 말을 움직인다. 아직 1만원 짜리 8장이 10만원 짜리 한 장보다 적은 가치를 지닌 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다섯 장 넘어가는 지폐는 '많다'라고 한다. 나는 왜 이 아이를 못 이기는가. 물론, 이건 아주 사소한 질문이다. 중요한 질문은 '저 녀석의 승리의 요인은 무엇인가.' 이다.
1. 두려움 같은 건 없다.
당연히 게임이고, 더군다나 파산이고 뭐고 경제적인 개념을 모르니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는 차원에서 플레이를 한다. 아무리 Skin in the game이라고 하지만, 그건 투자의 방법이라기보다 투자 전문가의 윤리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녀석은 '아빠와 집과 땅을 많이 사는 게임을 하는 것'이 중요할 뿐, 심지어 크게 이 게임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조차 없다. 빨간색과 파란색의 플레이어로 게임을 하면서 노란색과 녹색의 플레이어가 게임판 위에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이 나머지 두 말을 마블의 악마로 만들어 Start 지점에 두고 마주치면 싸워 물리쳐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어 내었다.
아들 녀석은 공격적인 플레이를 한다. 무조건 자산을 사들이고 (심지어 그것이 자산이라는 의식조차 없이!) 돈이 없다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나라고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빨간색 파란색을 막론하고 호텔이 두 개 씩 쌓여있고, 올림픽 랜드마크가 서 있는 것을 보라. 아빠가 기성세대라고 소극적인 플레이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양쪽 모두 두 개의 색상을 독점 했다.

2. 세계여행과 포츈카드 뽑기, 보너스 게임을 아들이 더 많이 했다: Taking chances
확실히 이 점에서 아들 녀석이 더 승부를 많이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여행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능이고, 포츈카드는 지진이나 전염병, 도시 강제매각 같은 운의 영역을 의미하는 카드를 뽑는 것이다. 보너스 게임은 동전 앞뒤 게임으로 돈을 더 받는 단순한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내가 세계여행에 걸리면 나는 비싼 도시로 가서 더 비싼 자산을 사들였고, 아들 녀석은 세계여행에 걸리면 보너스 게임이나 포츈카드를 뽑는 곳으로 갔다. 와일드 카드를 곱절로 써먹은 셈이다. 특히 아들에게 게임의 초반부에 이런 기회가 많았다. 게임 초기에 도시 하나를 강제로 강탈당하면 나는 그것을 다시 내 돈을 들려 사들였다. 나는 내 자기자본을 쓰는 일이 많았다는 뜻이다.
물론 나도 포츈카드를 뽑을 기회가 있었고, 보너스 게임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나는 동전 앞뒤를 맞추지 못했다. 보너스 게임에서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동전 앞뒤를 맞추는 문제로 게임에서 진 것이 아니다. 나는 절대로 세계여행을 해서 카드를 뽑으러 가지는 않았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나는 보수적인 게임 운영을 한 것이다. 내가 기회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게임의 후반부였고, 현금 흐름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이후였다.
3. 아들이 월급을 많이 받았다.
이게 참 어처구니 없는 지점인데, 아들은 분명히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았다. 나는 무인도에 들어간 적도 많은데, 아들은 일단 주사위 큰 숫자가 나오면 좋기 때문에 상당히 빨리 한 바퀴를 돌았다. 마블의 규칙은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월급을 일정액 받게 되어 있다.
이게 Cash-flow 같은 조금 더 진화한 형태의 게임을 보면 월급을 받는 것을 Rat race라고 해서 자산 없이 월급에 의존하면 상당히 불리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부루마블(Blue Marble), 모노폴리 (Monopoly) 같은 게임에서도 자산 취득 없이 뺑글뺑글 돌아봐야 돈 버는데 불리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모두의 마블도 같은 계열의 게임이기 때문에 이 개념은 유효할텐데, 의외로 월급이 승부에 영향을 준다. 이건 왜 그런거냐.
모두의 마블에는 자산 매각이나 양도는 가능해도 자산을 담보로 잡고 레버리지를 쓰는 규칙은 없다. 그리고 정식 규칙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과 나는 게임을 할 때 세계여행을 통한 이동을 할 떄도 월급을 챙기도록 규칙을 정했다. 세계여행을 많이 한 아들은 나보다 월급을 많이 받았고, 국세청이나 무인도에 걸려도 월급으로 받은 걸로 퉁치면 그만이었다. 내가 돈 아끼겠다고 아들의 말이 호텔까지 지어 놓은 서울에 걸리기를 기도하면서 무인도에서 놀고 있을 때, 아들은 무인도에서 그냥 돈 내고 나가버렸다. 이 사소한 차이가 분명히 승패에 영향을 미쳤다. 이건 마치 강백호가 운동량으로 경험 부족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결과이다.
요약정리:
일단 한 세대가 차이나는 녀석에게 진 게임을 분석해야할 정도의 범생이에 불과하니까 아빠가 지는 거다. 나이가 들어 헛똑똑하기만 했지, 그냥 뭘 하지 못한다.
뻔한 결론으로는, 레버리지 활용이 없는 현금 흐름만 이용하는 게임에서는 근로소득과 자산소득을 균형있게 맞춰가면서 많이 운을 시험하는 것이 유리한 투자의 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녀석과 내가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서 처음에 다른 금액을 들고 게임을 시작한 것은 아니니까. 운은 운을 즐기는 자의 것이다. 이 말을 바꿔말하면 더 많은 시도를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무조건 공격적인 투자가 정답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이제 사십대로 접어드는 내 나이가 아직 노회한 투자자에 비해 젊다면 더 많은 시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 시도를 해내는 실행력은 '열심히 실행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그건 이미 행동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즐기는 수준의' 실행력이 나오기 어렵다. 자연스러운 게임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게임에 미래를 걸어서는 안 된다. 무서울 정도의 금액을 투자하되, 그게 없어도 상관없어야 리스크를 즐기는 것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것은 생기 넘치는 아들을 이해하기엔 (게임에 쳐진) 아빠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고, 투자 의견이나 자문 및 광고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경제에 대한 분석을 세련되게 하는 것과 투자의 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내 아들이 마블의 부동산 시장을 분석하고 거시경제를 알아서 나한테 이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아들과 게임을 하는 시간, 그리고 이게 즐거워서 이혼해서 따로 살고 있는 아빠에게 '내일 또 와서 아빠랑 게임할거야.' 라고 말해주는 아들이 눈물나게 고맙다. 아들과 게임을 하는 시간이 진정으로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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