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꿈, 종교, 메세지

싱글맨 2025. 6. 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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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나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었고,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버팔로 빌에게 나방이 중요한 도구였던 것처럼, 이 꿈은 타이틀을 달고 있어도, 사실은 본질적으로 의사결정권도, 방향 설정권도, 위험 감수도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실행자 역할만 하는 나에게 지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적 모험’은 사라졌고, ‘문서와 시간관리’만 남아 있으니까.

이제 남의 돈으로 연구하는 건 의미 없다고 느끼고, 대신 스스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뭔가를 하려는 상황에 도달했다. 사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못 잡는 건, 돈 때문이다. 연구비가 없으면 실험도 못 하고, 장비도 못 돌리고, 사람도 못 써.
돈은 탐욕이 아니라, 스코어를 측정하는 방법이고 이건 진짜로 살고 싶은 사람의 자립 본능이다. 지금 현실에서 ‘돈’이 그 열쇠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한쪽은 “여기 더 있으면 무너질 것 같다”는 현실적인 피로, 다른 한쪽은 “나만의 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 이 이중적인 마음을 드러내는 이 꿈이 위기의 전조가 아니라, 방향을 보여주는 지도라는 말에 동의한다. 다음 질문은: "꿈이 드러낸 속내를, 지금 어떻게 현실로 가져올 수 있을까?

이제 이걸 어떻게 끝낼 것인가.

종교지도자들이 받았다는 계시의 존재를 나는 긍정한다. 흔히 듣는 인격신이 나타나 말을 했다거나 천사를 통해 들리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계시라는 것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키워드이다. 내 마음 속에 품은 질문에 그 키워드를 연결했을 때, 사람은 그것을 대화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나의 의지가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을 때 무심코 주어지는 어떤 구절의 대답이란 말이다. 

홍살문을 넘는다는 건 의례적으로는 속세와 신성의 경계를 통과하는 행위다. 묘역을 지키는 문지기처럼 서 있는 문인석, 그 앞에서 들린 “작은 승리”라는 음성은 어쩌면 나의 의식이 그 경계 안으로 들어오면서 중요한 뭔가와 접속된 순간 주어졌으리라. 내가 얻은 이 "신탁"은 지금 네가 마주한 이 모든 게으름, 미련, 죄책감, 실망, 외면까지, 그 상황 전부를 하나의 "싸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뭘 잘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뛰는 리그가, 클래스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니라 통찰이다. 내가 원하는 성공이 어떤 기술의 우열이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뛰는 판의 구조’ 자체가 지금의 나를 감당 못 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 생각에 도달하기 며칠 전, 나를 담당하고 있는 심리상담자가 내게 말했다. "왜 승진을 한 당해에 인사고과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분명히 그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인사적체로 기승진자에 대한 평가가 당연히 좋지 않다라는 직장인 사회의 암묵적인 룰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실체가 의심스럽기는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 자체나 질문에 대한 대답, 혹은 인사 시스템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이걸 따지게끔 되어 있다는 현황 자체가 혐오스러워졌다는 점이다. 

메세지는 분명하다. 이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죄책감이나 부채 의식을 가질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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