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이혼남의 독서 - 세상의 냄새를 다시 맡다.

싱글맨 2024. 9. 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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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를 위한 변명, 아주 짧은 소련사, 이상한 러시아, 돌궐 제국 유목사, 세상 친절한 이슬람 역사, 러시아어와 아랍어 교재를 읽어 왔다. 거기에 허영만 작가의 조금은 오래전에 나온 대표작들보다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두 권으로 된 작품과, 한 사람의 자서전을 읽었다. 이게 대략 4월부터 내가 읽어 온 책이다. 여기에 Github Essential이나 Julia, Langchain 같은 기술 서적을 포함하면 대개 두 해에 읽는 책보다 많은 책을 읽은 셈이다. 평소에도 내 독서량이 적은 편은 아닌데, 유난히 올해에는 더 많이 읽었고, 그 선택에 의미가 있어서 기록해둔다. 

2024년은 조금은 이상한 해다. 겉으로 보기에 특별히 변한게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변한 해다. 2019년이 나의 이혼과 함께 2010년대가 끝장난 시기라면, 2022년은 본격적으로 20년대의 시작이고, 이제 24년 사람들은 바귄 20년대의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새 출발을 하는 시기다. 마스크를 끼고 살던 시대를 사람들은 잊었다. 2019년이 찬란했으나, 그 뒤에 닥쳐올 재앙을 예지하지 못했던 해라면, 2024년은 ?껍데기만 남아 비루하지만, 그 뒤에 다시 올 기회를 아직 보지 못하는 해랄까.

방금 전 평소에 저녁 9시까지는 그래도 영업을 하던 카페에 갔다가 7시반에 마감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이다. 이제 비어 있는 1층 상가는 흔한 일이 되었고,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하는 인건비를 비롯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문 닫는 다는 얘기를 한 직원은 나에게 자기도 여기서 일한지 얼마되지 않는다고 했고, 아마 장사가 안 되서 예전보다 문을 일찍 닫으니 내가 시간을 못 맞춘 것 같다고 했다. 조용히 테이크아웃만 해서 밖으로 나왔다. 

내가 저런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의 냄새를 다시 맡기 위해서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내가 막 테크노밸리로 들어왔던 시절과는 또 다른 세상을 살아야 한다. 내가 읽은 어떤 자서전의 창업자도 그렇게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이쪽저쪽의 도시들을 전부 둘러본 다음에 일에 착수했다. 어쩌면 나는 여행전에 책을 먼저 읽고 있는 셈이다. 

그 자서전은 자서전이다 보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자기 검열과 편집이 들어가긴 했지만, 피터 틸의 책 제로투원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일론 머스크와 스티브 잡스의 평전은 제로투원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책이고,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은 글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더 많다. 누가 기업인의 평전에 대한 추천을 구한다면 주저없이 제로투원과 이 책을 선택하고 싶다.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유라시아라는 대륙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서다. 지금가지 한중일을 각각의 덩어리로, 유럽과 미국을 더 인기 많은 다른 덩어리로 인식하고 사는 세계는 끝났다. 그게 끝났다는 건 그 세계관이 끝장이 났다는 것이 아니라, 공간 지각 자체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라시아는 한 덩어리고, 인도와 중앙아시아, 러시아와 중동으로 연결되는 유라시아의 역사와 언어가 결국 한 덩어리의 땅에서 조금씩 달라진 것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읽은 책 중에는 쿠란도 들어 있다. 아직 스무장 정도를 남겨 놓고 있고, 아랍어로 읽어야만 특별히 그 감촉이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배달앱의 수수료 장사를 혁신이라 부르던 시대도, 할인쿠폰을 발행하는 장사를 하던 시대도 끝장이 보인다.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법인은 기본적인 매출만 발생시킨채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보낸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가 될 것이다. 세상의 변곡점이 두 세개쯤 지나갔고, 예전보다는 속도가 빠른 세상에 살게 되었다. 내 눈 앞을 지나간 세상의 소리와 책, 영화, 드라마가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 이제 2024년 세상은 가치 평가를 새로 하기 시작했다. 반짝이지만 가치가 없는 것, 혁신적인 것 같지만 사실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을 버리고 보다 실용적인 것과 보다 압도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고르는 분위기가 고착화하고 있다. 

아마 올해 마지막으로 남은 쇼가 미국 대선이 될 텐데, 해리스의 당선을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미국의 약화를 앞당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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