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이혼남의 구두 (feat. 자기 관리의 지표)

싱글맨 2023. 3. 26.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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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당일 신으려고 준비한 구두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그 구두는 나와 다른 이들의 결혼식, 졸업식과 장례식을 두루 경험했다. 아이러닉하게도 결혼식장에 신고 들어갔던 이 한 쌍은 가정법원에서도 신었다. 이혼을 한 이후에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게 남은 것들을 둘러보면서 고쳐나가는 일도 많아졌다. 이혼남의 구두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

어느 이혼남의 구두

멋쟁이는 절대 아니었던 내게 검정색 구두만 두 켤레가 남아 있었다. 발이 커서 국내 기성화는 잘 맞지 않는터라, 미국산인 Rockport의 검정색 구두를 맞추었었다. 볼 너비와 발등 높이에 맞추어 기성화보다도 훨씬 길쭉한 신발 모양이 나온다. 10년 동안 잘 관리하지 않은 신발은 많이 낡았다. 

뒷축이 헤어지고 가죽이 떨어졌다.

신을 때 구두주걱을 쓰지 않고 몸무게로 그대로 눌러 신던 구두라 뒷축의 손상이 심하다. 구두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수선이 가능한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이 한 켤레의 신발만 봐도 결혼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혼 이후에도 나의 이미지를 돌보지 않았다. 싸구려 신발을 전전했고, 이혼 이후에는 거의 컨버스를 신고 생활했다. 컨버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나를 꾸짖고 싶은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직장의 드레스 코드가 캐주얼하다고 해서 캐주얼에 만족한 점, 캐주얼로 입으면서 이미지를 신경쓸 수 있는데 그냥 대충 입고 말았던 점, 직장 이외의 곳에서 나의 이미지를 케어할 정도로 사람을 만나지 않은 점, 이혼 이후에도 결혼식 준비하면서 맞춘 수트와 구두를 계속 신은 점, 나의 방심은 끝이 없다. 

결혼생활을 뒤로 하기로 했다면, 이런 옷가지도 전부 정리해야 옳았다. 이혼기념일에 한 켤레의 구두를 맞추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걸 할 필요를 못느꼈다는 것은, 그만큼 네트워킹을 할 기회를 갖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40대가 되었고, 이제 나 혼자만의 실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나이대가 지나고 있었다. 직장 안에서의 드레스 코드에 만족했다는 것은 직장 외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음에도 나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학새 수준의 사고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론: 직장에서나 직장 밖에서나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서는 새롭게 나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걸 게을리했다. 

그 과오를 바로잡으려 한다. 구둣솔과 슈크림을 샀다. 

전역 이후 광을 내는 건 처음이다.

구두끈을 전부 풀어낸다. 그리고 구둣솔을 들어 먼지와 오물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군대 이후 처음이 아닐까. 구두를 솔질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구두는 세상과 나 사이에서 버텨주는 소중한 물건이다. 나는 자신을 소홀히 대한 만큼 이 한 켤레를 방치했다. 어쩌면 결혼생활에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뉴트럴

내가 사온 것은 군대에서 쓰는 소위 '구두약'은 아니다. 백화점 한 아늑한 코너에 있는 RESH에서 어느 색상에도 쓸 수 있는 흰 색의 뉴트럴 제품을 구매했다.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다. 

흰 색 뉴트럴 슈크림

흰 색의 슈크림으로 신발을 닦아내면, 마음까지 깨끗해질 것 같다. 나 자신을 소중히 다루지 않았던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결혼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하지만 저 하얀 크림으로 내 과오의 산물인 구두 한 켤레를 닦아내면 상처가 덧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굽도 상하고 가죽에 주름도 심하다.

버릴 천을 하나 구해 손가락에 감고 매캐한 슈크림의 향을 맡으면서 신발을 닦아나간다. 군대에 있을 때 물광을 내기 위해 저녁 9시즈음까지 검정색 구두약을 얼굴에 칠해가며 전투화의 광을 내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을 제외한 남자가 알아야할 지식들의 대부분을 군대에서 배웠다는 사실 말이다. '물광'을 자르르하게 내기 위해 전투화를 손질하면서도 그 때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남자의 삶이 언제나 Combat-ready 전투 준비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왜 이걸 민방위 훈련까지 다 끝난 지금에서야 깨달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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