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결정하는가?"
이게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한 문제다. 사회, 문화,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 인간 세상의 룰은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 결정권을 누가 행사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분야가 조금 달라지더라도 항상 비슷한 형태로 작용한다.
직장인 이혼남인 나는 아주 작은 문제에 대해서만 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해야하는 일의 세부사항이나 해야 하는 시간을 조금 늦추거나 빠르게 하는 정도의 결정권이 있을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 내가 할 일을 스스로 정할 수도 있지만, 항상 상위 결정권자의 힘의 범위 안에서만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누가 그 과실을 가질 것인가,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해서 결정할 권한은 아주 작다.
국가의 일을 국민이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일을 권력자가 처리할 뿐이다. 그들은 국민의 심기를 살피려하기 보다 여론의 눈치를 본다. 내가 일하는 회사의 결정권은 오너와 주주들에게 있다. 나에게는 그 정도 수준의 결정권은 없다. 내 몸에 대한 결정권도 방역 당국이나 세계보건기구에 내어 맡기는 일이 흔한 세상이고, 사람들은 상당 부분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고 산다. 그러면서 자꾸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행복과 정의 같은 거.
그게 자꾸 눈을 가린다. 규칙은 항상 똑같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고, 강한 사람들중 최종의사결정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의 일을 결정한다. 거기엔 희망이나 절망도, 멘토나 힐링도, 노력도 없다. 어떤 수단을 쓰는지는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은 책임과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권한이 능력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내려온다. 자리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트러스 전 영국 총리가 44일만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국 총리의 권한이 작아서가 아니라, 영국 총리의 권한보다 금융 시장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의 권한 따위로 금융 시장을 이겨먹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튜버의 힘은 구독자가 아니라 구독자의 규모에서 나온다.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의 힘은 팬이 원천이지만, 정확하게는 팬이 만들어 내는 시장의 규모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지는 몰라도, 대통령의 힘은 국민이 아니라 '국민이 법적 절차상 위임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권력과 그 인구의 규모에서 나온다. 기업 총수의 힘은 시가총액과 매출액에서 나온다. 규칙은 이처럼 같다. 뛰는 리그가 다를 뿐.
결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인지는 몰라도 부부의 결정권은 둘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있다. 완벽하게 평등한 부부라는 것은 통계적으로 적은 숫자에 불과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실제로 얼마나 적은지, 부부 관계 역학의 이론적 정합성이나 통계 데이터의 정확성 같은 문제 따위에 나는 전혀 관심 없다. 나에게 이혼이란 것은 이미 벌어진 이벤트이고, 나는 그 문제가 자기결정권의 문제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혼이나 결혼을 가지고 행복 운운하는 사람들을 나는 비웃는다. 나의 이런 비웃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분개할 일일 수도 있고,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따위는 별로 상관이 없다.
며칠 전 이혼 3주년 기념일이었다. 눈에 띄게 좋지 않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아직 보통 밖에 되지 않는 평범한 나였다. Mediocre의 삶이 풍기는 그 늙어가는 살 냄새가 싫다. 모든 영역에서 월등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영역에서 뭔가 뛰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처음부터 내가 결과물을 가질 수 없는 영역에서 잘 해보려고 했던 일, 온전히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인데 성과를 내지 못한 내가 싫다. 나를 혐오하진 않지만, 분명하게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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