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반려자는 만들어진 개념이다. '전통'이나 '국가', '신' 이랑 비슷하게 시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이 개념은 영화, 드라마 같은 20세기의 대중매체에 의해 확산되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영어를 배운다는 핑계로 줄창 봤던 미드 '프렌즈'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가족을 소재로 하는 각종 영화들이 이 개념을 확대 재생산해왔다. 항상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주인공 캐릭터들, 가족이 그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아무런 확신이 없지만, 이야기는 돌아가는 그 장면에서 완성된다. (글을 쓰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니 그건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룬다. )
이혼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대부분의 정보가 쓸모없는건 우연이 아니다. 각종 포탈에서 상위노출되는 이혼 키워드 검색 결과가 거의 이혼 사건을 다루는 변호사의 블로그이기 때문이고, 대중매체에서는 부부가 이루는 가정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것처럼 현실의 왜곡하며, 국가 혹은 사회가 이혼을 금기시해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실사회가 모두 다 짠 것처럼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행동한다.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 전체가 쓰레기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이 당면한 각자의 이혼 현실에 맞는 정보를 쉽게 찾기 어렵기 때문에, 쓸만한 정보를 빠르게 추려내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내 자식도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건 일말의 의지가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부모 뜻대로 되는 자식만큼 무기력하고 슬픈 것이 있을까. 그렇다면 현재 나의 배우자가 죽을 때까지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과 사회적인 관습은 어디서 나오는가. 배우자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배우자는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남이다.
흔히 황혼이혼을 다루면서 '평생의 반려자'라는 표현을 쓸 경우에 우리는 그게 가능했던 시대의 그림자를 정확히 봐야한다. 평생의 반려자라는 개념이 가능했던 건 20세기 중반 이전의 세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직 생산력이 부족하던 시절, 전쟁과 질병, 위생 문제가 심각해서 60세를 전후해 생을 마감하던 시절에 탄생한 개념이란 말이다. 그 당시 평생의 반려자라고 해도 길어야 최장 40년, 보통은 그 보다 훨씬 짧았을 것이다. 부부중 한 명이 40대에 사망하는 경우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부부가 영위하는 '평생'은 21세기보다 훨씬 짧았다.
지금은 다르다. 30세에 결혼해도 평균수명 70세까지 최소 40년의 결혼생활을 해야 하고, 부부 지위를 유지하면서 더 오랫동안 생활하는 것이 가능은 해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같은 메뉴로 식사만 두세끼 해도 물리는데 50년, 60년을 한 사람과 살아라? 비현실적인 요구다. 당신은 배우자의 늙어가는 몸과 마음을 감당할 수 있는가. 당신의 배우자는 그럴 만큼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경제력과 스태미너, 정신력과 경력을 갖춰나가는 사람인가. (나는 이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극히 적은 일부 소수가 성공하는 미션이기도 하다. 결혼이나 배우자에 대한 가치관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얼마나 통계적으로 어려운 일인지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극히 어려운 미션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역사에서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말하고 싶다.)
그 신성한 결혼과 가정을 지키고 평생의 반려자와 함께 하는 비결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이 알고 보면 얼마나 알량한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흔히 주류 언론사에서 인용하는 오가와 유리의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따위에 나오는 15개 남편 관리법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누가 누구를 관리한다는 것인가.) 평생을 함께하는 대등한 인간이 누군가를 길들인다? 글쎄 동사 '길들이다'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 어감이 주는 묘한 뉘앙스가 거슬린다. 이혼에 대한 주요지면과 아침 티비프로그램에서의 상식은 이런 묘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혼한 남성이 더 치명적이다, 더 쉽게 건강이 나빠진다, 여성은 관계 중심적이라서 이혼 이후에 더 잘 버틸 수 있다.' 이런 티비 내용들을 접하게 되면 별 동요없이 무시한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고, 자존감이 낮아 자기관리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 이혼이 더 치명적이다. 그게 남성이다 여성이다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뭉툭한 기준을 가지고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명제는 그냥 성급한 일반화에 불과하고,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니다.
결혼은 왜 하는가? 결혼을 사랑때문에 하는게 아니라는 건 이미 다른 글에서 다루었다. 결혼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 2세를 낳고 만나는 것, 배우자의 경제력이나 배우자의 집안 배경을 활용하는 것, 두 사람이 공동체가 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극한 상황인 경우, 이 정도가 내가 아는 결혼의 이유이다. 배우자를 통해서 얻는 반려와 이해를 통해 느끼는 따뜻한 감정은 옵션이지, 당연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결혼 생활이 힘들어도 버티고 사는가. 사랑해서? 아니다. 지긋지긋하지만 그 결혼을 버텨내지 않으면 내가 당장 죽을 것 같거나, 그래도 못내 자식이 그리워서. 이런 것들이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이혼이 어려운 이유들이 아닌가.
자칭 가정문제, 사회복지, 여성문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체에 한 자리 차지하고 나와서, 가장 좋은 노후 대책은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라고 말한다. 틀렸다. 당신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나더라도 처음부터 당신에게 큰 타격이 없도록 설계되어야 하는 계약이다. 부부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다가 황혼이혼을 맞는 것이 그렇게 큰 리스크라면, 애초에 결혼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노후 대책이고, 빠른 이혼이 차선책이다. 아직 모르겠는가. 배우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공동명의로 소유한 재산이 나를 위해 쓰일 것이라는 장담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경제력에 따라 부부 사이에서 발언권도 차이나는 게 현실이다. 노후를 위협하는 3대리스크가 황혼이혼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치 않은 그냥 한 결혼을 나이들어서도 유지하는게 노후를 위협하는 리스크다.
그런데도 왜 사회가 결혼을 권할까.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생활을 위해서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나게 만들려고 든다. 왜 그럴까. 그건 당신을 그냥 평범하게 보거나 흔하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거부하고 아이를 가지지 않는 커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알게 모르게 결혼을 권하는 사회와 국가가, 구성원인 개인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한다. 수상한 냄새를 감지한 것이다. 당신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능력이 있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 반려동물은 배우자보다 더 애틋하고 충성스럽다. 어떤 사람은 동호회 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와 국가는 이걸 인정하기 싫어한다. 다들 똑같이 아무런 이유없이 직장에 나가고 애를 낳고 살기를 원한다. 당신이 그렇게 능력있고, 다른 사람과 다른 걸 인식하거나 바라는 걸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평생의 반려자는 필요없었다. 배우자와 만나는 건 특별한 경험이지만, 배우자에게 나를 평생 특별하게 생각해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동의하지 않거나 다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정해진 기간 동안의 반려자' 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해나가는 것만큼 나를 지키기 위해 이혼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란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 의무가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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