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딸과 아들에게,
너희에게 아빠가 어린이날 선물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빠에겐 기쁨이다. 너희가 이제 레고를 가지고 놀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일단 레고를 하나씩 연령대에 맞는 것으로 선물을 준비했다. 조금 아쉬운건 너희들을 만나러 가니 이미 집에 레고가 있더구나. 아빠가 너희에게 레고를 처음 사주는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항상 그렇지만, 너희들은 원하는 것이 분명하지. 레고를 사주고 싶은 것은 아빠의 마음이고, 너희들이 가지고 싶은 것은 또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딸은 미미를 원했지. 정확하게 네가 원했던 미미 세트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미미 세트를 선물로 준비했다. 물론 이번에 너를 위해 준비해둔 레고는 동생의 생일에 너에게 따로 줄 선물이 될 것 같구나.
조립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거의 대부분 아빠를 시켜서 조립한 것이지만, 네게 줄 쥬라기 공원의 트럭을 조립하는 것도 아빠에겐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 딸에겐 좀 더 네가 원했던 것에 가까운 선물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미 세트를 선물한 것에 대해서 아빠가 같이 놀아주는 것이 어색하다는 점은 아빠가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미미나 바비 혹은 공주 캐릭터 선물을 하는 것이 딸에게 성역할 고정관념을 형성한다는 걱정같은 것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 딸이 미미를 원하면, 아빠는 미미를 준다. 오히려 아빠가 아쉬운 점은 아빠가 공주 캐릭터가 테마인 장난감을 함께 가지고 노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함께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히면서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 아빠에겐 조금 어렵다. 그래도 이 선물을 주인은 너희들이고, 아빠는 너희가 이 선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빠가 엄마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기 떄문에, 선물중에 일부는 아빠집에 놓고 가고, 일부는 가지고 가서 노는 것들이 생긴다. 어느 선물이나 소중하지만, 아빠 집에 놔두게 될 선물들은 아빠가 조금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아빠는 너희들에게 세계를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란다. 그런 마음으로 2023년 어린이날에는 지구본을 선물했단다.
모두의 마블을 하면서 보았던 브라질의 예수상을 알아보는 너희들을 보며 아빠는 말할 수 없는 흐뭇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 지구본은 너희들이 아빠를 만나러 올 때 어김없이 아빠의 책상 위에 있을 것이다. 아빠는 너희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먼저 물어본다. 나의 딸과 아들아, 너희들은 이미 대한민국이 일본과 중국에 비해서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를 불만스러워 한다. 너희들의 그 불만을 가슴 속에 담아 두길 바란다. 그리고 너희들이 이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을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에 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애초에 지구에 한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빠는 아빠가 읽은 책 속의 이야기에 스스로를 너무 많이 가두어 버렸다.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지금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너희들에게 줄 선물은 물건이 다가 아니다. 너희들에게 진짜 선물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란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너희들이 아빠의 선물을 받아줄 의향이 있는지이다. 너희들에게 아빠가 아빠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아빠가 하는 선물이나 이야기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겠지. 그것이 아빠의 몸과 정신을 일으켜 세운다. 아빠는 아빠고 너희는 너희들이다. 아들가 딸아, 너희들이 반드시 너희들의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와중에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려면, 아빠가 너희들에게 아빠여야겠지. 어쩌면 너희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사면서, 아빠는 이렇게 마음을 추스리는 것으로 아빠 스스로를 돕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이빠에게 다가와서 '아빠'라고 불러준다면 아빠는 너희들에게 반드시 해줘야 하는 얘기들이 있다. 그건 아빠와 엄마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고, 너희들이 세상에 오기까지 금세기와 지난 세기에 벌어졌던 중요한 일들이다. 이건 아직 어린 너희들에겐 너무 어렵고 복잡한 얘기들이다. 그리고 그건 너희들의 할아버지도 등장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우리 딸이 지구본을 새삼스럽게 보게 되는 날이 올까. 이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아들아 너는 가만히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딸과 아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빠 바보 (0) | 2023.06.22 |
---|---|
이혼남, 아빠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때 (0) | 2023.06.04 |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0) | 2023.03.05 |
새해 해돋이를 하지 않는 이유, 겨울 바다 (0) | 2023.01.08 |
생활 속의 작은 실수들을 반성하며 (feat. 영화 '샷콜러') (1) | 2022.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