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이혼남이 상속한 아버지의 유품 part I

싱글맨 2023. 5. 1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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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차를 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차 안에 있었다. 글라스 컴파트먼트 안을 무심코 열었을 때, 굴러떨어진 썬글라스 하나. 근처 안경점에 가지고 가서 피팅을 다시 했다. 휘어진 테를 복원하고 내 얼굴 길이에 맞추어 써보았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위해 운행했을 때 썼던 그 녀석이다 . 사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썬글라스

당신께서는 썬글라스 너머로 무엇을 보았을까. 

유품은 꼭 간직하겠다고 마음먹어도 여기저기 잃어버리기 쉽다. 한편으로 유품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서랍장 구석에서 나오는게 유품이다. 유품을 정리해놓은 사당을 두고 있다면 모를까, 좁은 삶의 공간에서 생활에 치이다보면 어느새 잊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삶이 비루하다. 

비싼 물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싸구려도 아니다. 피팅을 해주신 안경사님의 말씀으로는 6-7만원 선 정도의 흔한 안경테, 녹색이 약간 들어간 회색의 렌즈에 에비에이터, 혹은 제너럴 형태의 썬글라스다. 어차피 가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물건이니 분명히 언젠가 수명을 다하는 날이 오겠지만, 내가 이 썬글라스를 버릴 일은 없다. 아직도 이 썬글라스는 바뀐 차 안의 글라스 컴파트먼트를 채우고 있다. 장례를 치른 것이 벌써 10년 전, 이 안경테는 다시 휘고 코받침은 주저앉았다. 곧 기일이 돌아오는 며칠 후에는 다시 안경점에 가져갈 생각이다. 

아버지가 '보잉'이라고 부르던 이 타입의 썬글라스를 동경했던 기억이 있다. 학생일 때 썬글라스를 살 돈 따위는 없었지만, 언젠가 일을 해서 급여를 좀 모았을 때 레이밴을 한 번 샀던 적은 있다. 유품과 같은 모양은 아니었고, 조금 더 얇은 레이밴 특유의 유리 렌즈가 끼워진 녀석이었지만, 7년 넘게 쓰고 완전히 안경테가 망가졌다. 그 이후로 내가 별도로 썬글라스를 샀던 적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 만원 이하 길거리표 썬글라스 들이었다. 

아버님의 유품인 썬글라스를 발견하고 나서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유품인지도 모르고 알게 모르게 의식하지 않고 썼었다. 지금은 폐차를 한 그 차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는 큰 감흥 없이 필요에 의해서 썼다. 오랫동안 그렇게 유품인지도 잊혀졌던 이 썬글라스를 다시 기억해낸 건 이혼을 감행하고 나서, 처음으로 아버님의 산소에 갔을 때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썼던 썬글라스를 아들이 쓰고 당신을 모신 산소에 쓰고 조심스럽게 돌을 어루만진다. 

아버님은 아들의 이혼을 예상했을까. 당신께서 어머님께 한 말을 나는 나중에 전해들었다. 그는 아들의 선택을 믿었고, 그 말을 아내에게만 한 채 나에게 굳이 전하지 않았다. 아버님은 아들을 너무 믿었다. 그는 아들의 이혼을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의 결혼에 대한 우려는 있었다.

썬글라스를 끼고 해가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이혼에 대한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나의 아이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너희들을 끼고 짖궂은 장난을 잘 쳤을 거라고.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아버님을 아이들은 생전에 만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다음 아이들을 만나는 날이 아버님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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