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든 사업자든 상관없다. 일을 하면서 쉽게 착각을 하곤 한다. 어떤 서류 작업이나 행정적인 일을 처리했다는 것으로 자기 일이 끝났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도 출근한 어떤 사람들은 파워포인트 형식의 보고서나 엑셀 양식의 칸을 채움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그들이 한 일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파워포인트의 기생충들이다.
참석자 평균 연령이 높은, 특히 임원이 주재하는 회의에 들어가는 일만큼 꺼려지는 것이 없다. 그들이 '커리어'를 통해 갈고 닦는 기술은 종종 그 '빈 칸을 채우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가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회의라는 건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자리다. 그러나 정작 모인 자리에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툴이 많이 생긴 탓에 그들이 회의 시간에 하는 일은 그 '툴'들을 공용 모니터에 띄워 놓고 여기에 뭘 적어 넣을까를 고민하는 일이다. 아니, 사실 고민을 별로 하지도 않는다. 퇴행적인 경우 회의를 주재하는 담당 임원이 읊으면, 그걸 내일 모레 50인 아저씨가 받아 적는 것으로 업무가 진행된다. (그래놓고 은퇴해서 뭘 하겠다고?)
Confluence나 Evernote를 이용해서 작성하기로 한 양식을 굳이 파워포인트로 작성하고, 파워포인트 이미지를 Notion에 붙여 넣는다. 나머지 칸을 채우기 위해 퇴행적인 대면 회의를 다시 잡는다. 사실상 그런 회의 자리에서 하는 얘기들은 그냥 메신저를 통해서 대화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 사람이 세 사람이상 필요한 경우도 많이 없다. 이런 회의를 들어갔다오면 저 사람들이 부르면 다시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지는 않다: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은 많이 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ChatGPT를 가장 많이 얘기하는 사람들이 ChatGPT를 가장 사용하지 않는다. 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내의 MZ세대 직원이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TF따위에 들어가서 각자 회의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받아적는 사람은 대개 M세대겠지. 회의실에 Z는 없다. 이걸 뻔히 아는 사람들이 기업의 생산이 왜 낮은지를 묻는다?
Z세대들이 기업 문화를 대놓고 사갈시 하는 이유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기업 문화가 수직적인지 수평적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살림살이가 힘들수록 조용히 일하게 되어 있다. '조용히 일한다'고 해서 요구할 걸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노조가 있는 회사릐 주식을 절대로 사지 않지만, 사내에서 노조가 알아서 잘 활동하길 바란다. 일만 잘 해결되면 내 상사가 아주 수직적인 사고를 해도 상관없지만, 상사가 맘에 안들면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표방하며 조용히 인사팀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중적인 태도는 생존에 아주 효과적이다. 같이 일하는 기생충들에게 오늘의 파워포인트 업무를 미루지만, 그들에게 불평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중요한 이리라고 믿는 삶을 살고 있으니 내가 그걸 방해할 이유는 없다. 내 일을 할 때 내가 그들처럼 일하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다.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은 반드시 회의라는 걸 필요로 한다. 첫째, 나 스스로가 의사결정에 지분을 가지고 있을 때. 둘째, 의사결정은 아니지만 실제로 어떤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 서로 호흡을 맞추거나 몸 쓰는 일의 순서를 맞춰야할 때, 이렇게 두 가지 정도다. 특히 대기업에서 회의가 인생의 시간 낭비인 이유는 둘 다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내 발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회의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결론은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다른 사람의 발등에 올려 놓는 결론을 낸다. 이미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게 어차피 안 할수는 없는 일이지만, 해봐야 폭탄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아마존이나 인텔이 보고서를 워드에 작성한다고 해서 순진하게 '워드'에 방점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보고서 양식을 '워드'로 바꾸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파워포인트의 사용을 금지시킨다. 조금 팬시한 임원들은 Notion이나 Flow를 쓰면 이런 일이 해결될거라고 생각한다. 정답부터 말하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워드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워드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보고서란 무엇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의 흐름과 논리적인 결론이 요약된 문장의 집합체이다. 즉, '일을 하기 위한' 합리적인 생각의 집합이란 말이다. 그래서 보고서의 핵심은 결국 일이 되게 만드는 Argument 혹은 Solution이다. (이걸 단순히 논술 혹은 주장이나, 해결책으로 번역하면 이상하게 그 뉘앙스가 죽는다.) 기술적인 내용, 분석과 증거는 그 다음이다. 일이라는 건 행동이고 보고서는 그 행동을 위한 의사결정과 그 과정을 정리한 글쓰기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직장인의 대다수가 하는 일이 되었고, 이런저런 규제와 요구로 사업자들도 문서 작성이나 행정 업무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기록을 남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직장에서 나는 남이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한 일에 내 시간을 갈아 넣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것 자체가 나쁜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에서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도움이 적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문서 작업은 일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게 '커리어'가 될 수는 없다. '미생'에 나오는 중고차 사업을 기억하는가. 핵심은 그들이 한 사업이지, 그들의 '보고서'와 '발표'는 두번째이다.
사무실과 회의실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면 오늘도 어떤 양식의 빈 칸을 채운 일이 마치 내 일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걸 그냥 받아들인 사람들이, 내 옆자리에 너무 많다. 그들은 그 빈 칸을 채우면서 더 많은 성과급과 더 적은 노동 시간을 요구한다. 기업의 오너들이 그냥 급여를 지불하는 건, 그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려고 들면 당장 매출에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급여를 받아가는 사람이 맘에 들어서가 아니다. 내가 노조와 거리를 멀리 두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와 노조의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내가 사무실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냉정하게 말해, 내가 소위 대기업에서 하고 있는 일은 알고리즘을 잘 짜면 나 없이 돌아가도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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