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어느 이혼남의 휴일 (feat. 689 White Wine, Napa Valley, 2020)

싱글맨 2023. 2. 2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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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결행한지 4년이 지났다. 4년의 절반을 심리 상담으로 보냈고, 얼마전 심리 상담을 졸업했다. 세상은 나한테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 4년간 일을 했고, 일을 하면서 시장의 소용돌이가 칠 때 다행스럽게도 나름대로 항해를 해나가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2023년 2월 이사도 마무리했고, 흔한 대기업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나 직장에서는 이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사무실 밖 전경

자정이 지난 시각, 나의 또다른 일터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지나가는 2호선 막차를 지켜보며 오늘 업무의 마감 내용을 생각해본다.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 그래도 퇴근 후에 40분씩 걸어다녀야 했던 초기 사업장보다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2022년보다는 훨씬 관리되는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마스크에 손을 대는 순간 코트의 주머니 안 쪽이 뚫렸다. 그러고 보니 신발도 뭔가 이상했다. 뭔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신발 옆 선의 접착제가 떨어져 있었다. 

구멍난 신발


나에게 상을 주고, 수입의 일정 부분을 나에게 재투자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15년을 넘게 입은 코트와도 이제는 작별을 해야하지 않을까. '이혼남의 이미지 관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생각했던 일들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결혼하면서 장만했던 수트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해보인다. 어찌보면 후줄근한 대학원생에서 벗어나는 일을 나는 조금 더 일찍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금은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날 저녁, 조금은 호사스러운 식사를 했다. 4년동안 입에 대지 않던 술도 주문했다. 간단한 라자냐에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심장마비 이후로 입에 술을 대지 않았었고,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나온 와인도 일부러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은 한 잔 해야겠다.

689 화이트, 나파 밸리 2020

혼자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박사학위 졸업을 하면서 마셨던 와인이 기억난다. 2013년 Blue Bird 였던가. 학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샀던 와인, 그게 나 혼자 나를 위해서 마셨던 마지막 와인이었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자연의 느낌을 담아 만든 다는 느낌만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느낌이 있어서 좋아했던 것 같다. 식사를 주문하면서 나파 밸리의 화이트 와인이 있길래, 그걸로 주문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새콤한 보석같은 맛이 후각을 자극한다. 산미 때문에 다듬어지지 않은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의외로 부드러운 목넘김에 거친 보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단 맛이 적어 부담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같이 나온 라자냐의 크림 소스가 만나니, 그 부드럽지만 존재감 있는 산미가 입안에서 녹아 사라진다. 크림의 무게감과 함께, 와인의 향이 있었던 자리만 남아 있고 맛과 향기가 모두 사라졌다. 와인처럼, 그렇게 나의 결혼생활과 이혼의 감정들이 와인과 함께 사라졌다. 

결혼과 이혼이 합쳐진 지난 10년의 시간과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 결혼과 이혼이라는 사건의 기록만 남아 있고, 나의 머릿 속에는 아이들과 내가 남아 있다. 이제야 이혼의 감정적 동요를 혼자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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