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넘은 드라마로 작고한 고 이순재 배우가 등장하는 (그가 없는 사극이 몇이나 될지는 의심스러우나) 사극중에 '상도'라는 드라마가 있다.
HBM으로 바짝 달아오른 반도체 시장을 보고 있자면 이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시대와 제품이 바뀌었을 뿐, 본질은 거의 같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 인삼은 전근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약재였다. 실제로 효능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사실 크게 상관이 없다. 사람은 항상 원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냥 인삼도 아닌 홍삼은 쪄서 말리는 증포 기술이 주요 기술이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시대는 조선후기 순조 치하 홍경래의 난을 전후로 한 혼란한 시대였다. 아편 중독 환자가 늘어가는 청의 수요는 견고했고, 자체적으로 재배나 증포가 되지 않는 시장 상황상 청은 홍삼의 조달을 전적으로 조선에 의지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만상이나 송상등의 기업 구조는 후진적이었으나, 이들은 청의 수요에 힘입어 홍삼 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하였고, 내수가 아닌 수출로 판매되는 물건으로 외국의 부가 조선으로 들어오는 거의 유일한 케이스였다.
HBM은 현대의 홍삼이다. 2D 반도체 미세공정과 이걸 3D 구조로 만들어 올리는 패키징 정렬 기술이 핵심이다. 만들 수 있는 곳은 한국과 대만이다. 사실 TSMC가 더 큰 제조 주체라는 점이 드라마와 다르다. 하지만 드라마와 달리 중국만 두 나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이 두 나라에 의존한다.
현대는 순조 치하의 조선보다 더 지정학적 리스크가 크고, 제약 산업이 청의 공중 보건과 관계된 산업이었다는 것보다 반도체의 중요성은 훨씬 크다. 방위 산업, 금융을 비롯한 모든 산업이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빅테크가 AI를 선도한다면, 이 하드웨어를 만들어내는 곳은 한국과 대만이다.
드라마를 보면 홍삼 무역은 세수 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이 제한되고, 철저한 신고와 허가로 컨트롤되는 공무역이 주가 되었다. 밀수가 있기는 했지만, 자유 무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 점은 반도체도 동일하다. 국가간 전략적 비교 우위가 반도체와 AI로 결정되기 때문에 반도체 시장은 점점 더 경직되고 있다.
역시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 속의 악역인 송상은 홍삼 생산을 수직계열화 하기 위하여 송도*(개성)에 직접 홍삼 증포소를 건립하고 운영권을 관아에 넘긴다. 마치 파운드리를 짓고 이를 국가에 기부체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운드리 건설이나 팹 라인을 하나 짓는 것은 수십조의 예산이 동원되고, 드라마에서는 증포소를 짓다가 불이나 전부 태워 먹는 장면도 나온다. 엄청난 CAPEX 투자를 감행하고 대통령들이 오면 라인 하나에 축구장 몇 개 가격쯤 된다고 자랑하는 것이 본업인 어떤 사람이 생각난다.
상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홍삼을 독점한 만상이 청의 담합을 깨기 위해 홍삼을 불태우는 수를 쓰는 장면이다. 드라마에서는 시세의 두 배로 홍삼을 1만근 이상 수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속이 시원하지만, 실제로 그런 무리수가 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지금 한국은 HBM을 독점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런 무리수를 쓰면 당장 미 해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원한 시장이 없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싸이클을 타는 대표적인 산업이고, AI가 계속 가도라도 이 수요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는 없다. 홍삼 무역에 의존하여 조선이 싱공업 국가로 체질개선을 해낸 것이 아니듯, KOSPI 시가 총액의 거의 절반이 반도체 양사로 채워지는 것은 한국 경제 전체에 결코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다. 기업은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물이 들어온다는 말 자체가 이미 다운턴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누구 귀에 들릴 것인가. 나는 이 상황에서 내 조각배를 어떻게 몰고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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