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위기를 겪지 않는 사람을 매우 부럽게 생각한다. Mid-life Crisis라는 단어는 심심치 않게 미디어에 등장한다. 아침 드라마 따위에 등장하는 형태로, 혹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펀치라인이 될 수도 있지만, 이 위기를 겪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늘상 똑같은 출근길에 어느 순간 자신을 의심하게 되는 그 느낌, 그렇다. 바로 그거 말이다. 당신이 월요일 아침마다 겪는 바로 그 것.
출근길 지하철에서 혹은 셔틀 버스에 오르면 바로 그 특유의 냄새가 있다. 딱히 좋다고 안 좋다고 하기에 애매한 그 냄새, 희망과 자조와 일종의 포기가 뒤섞인 그 냄새, 상큼한 섬유유연제 향기 사이로 느껴지는 기름에 절은 정수리와 결코 좋다고 할 수만은 없는 바로 그 '지난 주'의 냄새의 혼합물. 중년의 위기는 다름아닌 그 자리에 있다. 에어팟을 쑤셔넣은 귓구멍과 어려운 자세로 잠을 청하는 자, 화장을 고치는 여자의 컴팩트 거울 속에 있단 말이다.
이윽고 어찌어찌 직장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크거나 작거나 허름하거나 주말을 보내고 직장에 도착해서 당신이 일종의 안도감으 느낀다면, 분명히 당신은 위기를 겪고 있다.
일요일 저녁부터 배가 아프고 편두통이 생길 정도로 월요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월요일에 직장에 와서 쉬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의 경우가 흔한 직장인의 고민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상태가 좀 더 심각하다. 당신이 주말에 집에서 쉬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배우자와의 다툼이건, 육아의 스트레스이건, 친가나 처가의 크고 작은 대소사이건, 이유를 불문하고 분명히 당신의 주말은 당신의 평일보다 피곤했다. 차라리 몸이 힘들면 좋지만, 마음이 무겁다면 분명히 당신은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다.
나도 그랬다. 출근해서 팬트리에 들어가자마자 독한 커피를 내려 위장에 쏟아붓고 나서야 안도감이 들곤 했다. 그 쌉쌀하게 식도를 태워내려가는 느낌이 그나마 나를 맨 정신으로 돌리곤 했다. 여기서부터 증상의 중증도를 또 판별할 수 있다. 카페인이 중추신경을 흔들어 깨우고 전두엽에 이르고나서 당신이 책임감과 부성애/모성애 혹은 배우자에 대한 사람으로 이 피곤함을 떨칠 수 있다면 당신은 스스로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혼을 앞두고 커피를 마신 월요일 아침 시간 (대략 7시 30분경이다.)에 드는 생각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일을 한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일을 한단 말인가. 자아 실현을 위해? 요즘 중학생들도 과연 이런 대답을 할까? 돈을 위해? 맞는 말이지. 그런데 그 돈은 지금 어디에 있나? 계좌를 열어 본다. 그게 주식 계좌이건, 코인 계좌이건, CMA건 상관 없다. 한 달 월급이 채 안 되는 돈이 들어 있을 때의 그 막막함.
이런 막막한 경험은 대학생일 때도 경험했다. 실연당하고 입대를 앞두고 있을 때쯤, 학교 한 복판에 서서 내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지금에 비하면 아주 낭만적이었다. 아직 20대였으니까. 아직 시간이 있고, 나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위기는 더 암담하다. 이 거지 같은 느낌이 다시 들었을 때는 최소한 30대 중후반, 혹은 40대일 것이고, 이제 미래라고 믿었던 것들은 현실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타임스탬프라고 믿었던 날짜가 되었고, 그 요상한 느낌과 함께 나의 꿈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따. 아마 다행히 취업 정도만 해결했을 것이다. 더 이상 달릴 활주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세월이 흘렀다. 화장실에서 나와 찬물에 세수를 하며 얼굴을 바라본다. 눈가와 목에 주름이 생겼다. 하나둘 흰 머리가 벌써 생겼을 수도 있다.
분명히 당신은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다. 당신이 월요일에 출근해서 쉬기 시작하는 이유가 당신의 결혼 생활이라면 중년의 위기는 이혼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여기에는 아주 강력한 촉매가 필요하다.
...
...
...
...
...
...
내가 얻은 촉매는 이런 거였다.
역류성 식도염으로 타들어가는 위장이 느껴진다. 아까 빈 속에 마신 커피가 역시 좋지 않았나보다. 다음 주에는 유럽 출장을 가야 한다. 갑자기 균형을 맞춘답시고 내가 주말 동안 잘못한 일들을 생각하며 반성해본다. '그래도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육아보다 설거지가 편하다는 생각에 자진해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장을 보러 나갔던 (!) 나의 비겁함을 반성하고 다시 한 번 CMA 계좌를 바라보던 그 때 갑자기 잔고가 0이 된다. 무슨 일이지?
난 이체를 한 적이 없다. 혹시 뭔가 자동 이체를 걸어두었나 싶어 자동이체 신청 내역을 확인한다. 혼돈이 머리를 지배하다가 지금은 퇴물이 된 그 당시의 공인인증서가 배우자의 손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타들어가는 식도의 통증보다 100배 강하게 분노가 타오른다. 지문과 홍채 인식으로 방어되고 있던 폰의 보안이 뚫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어느 수준의 촉매가 위기를 이혼으로 만드는지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묘사한 것과 비슷한 경험을 당신이 일상적으로 하고 있을 경우 무언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중년의 위기는 단순한 기분이나 우울이 다가 아니다. 그건 경고다. 당신의 인생이 뭔가 고장났다는 경고말이다.
'생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혼의 유효기간은? (feat. 2023년 발표된 작년 이혼통계) (2) | 2023.05.02 |
---|---|
이혼남 출근룩, 어떻게 입을 것인가. (feat. 리바이스) (4) | 2023.05.01 |
이혼남, 첫 월세를 받다. (feat. 아파트 공시지가) (2) | 2023.04.20 |
아빠임을 느끼는 순간 (2) | 2023.04.16 |
이혼남의 구두 (feat. 자기 관리의 지표) (0) | 2023.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