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착각하지 마라, 이혼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싱글맨 2022. 5. 16.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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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당당한 이혼'이라는 착각이 미디어를 배회하고 있다. 이혼은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혼은 독립의 과정이기도 하니까 분명히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이혼 자체는 항상 원하지 않았던 상황을 동반하는 사건이다. 이혼 자체와 이혼 이후의 삶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 상처를 극복하고 삶을 이어가려는 피나는 눈물겨운 노력이 있을 따름이다. 이혼을 결행하는데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혼을 결행하는 것과 이혼을 떠벌리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블로그에서 이혼을 다루는 것은 이혼에 이르게 된 나 스스로를 반성하고, 실제로 생존해나가는 과정을 기록함으로써 분별력을 잃지 않으려는데 있다. 

이혼 과정에서 얼마만큼을 재산분할로 뜯어낼지, 어떻게 하면 상간자를 욕보일지를 궁리하는 것은 과연 나의 생활을 바꾸는가. 물론 시원하고 통쾌하겠지. 개꿀이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사실 나도 그런 글을 블로그에 쓰는 것을 고려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혼 이후 새롭게 독립한 사람으로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얼마나 내가 통쾌한가는 엄밀히 다른 문제다. 의도했든 하지 안았든, 이것은 자기 이혼을 '자랑하는 컨텐츠'로 만드는 일이다. 

가십 키워드 위주로 나도 조니뎁이나, 빌 게이츠 같은 유명인과 유력자의 이혼생활을 글의 소재로 삼아 블로그 조회수를 올리려고 할 수도 있겠지. 한국의 티비는 심지어 시즌제로 운영되는 '우리이혼했어요'부터 채널마다 이혼을 다루고 돌싱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으로 넘쳐난다. 소재로 활용할 수는 있으나, 그 글을 적고 있는 내 시간이 아깝다. 이전에 쓴 '돌싱 티비프로그램' 이라는 글에서도 이미 비슷한 생각을 기록한 적이 있지만, 이혼 이후의 삶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다. 이혼한 사람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경제적 사정이 녹록치 않은 경우가 상당히 많을 것이고, 유지는 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단순히 이혼 이후의 돈 문제를 떠나서, 이혼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면, 이후의 삶은 뭔가 좀 더 나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착각하지 말아라, 이혼은 유튜브나 티비프로그램에서, 혹은 브런치나 블로그를 통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혼에 대한 블로그가 없어야 한다거나, 이혼 자체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혼이라는 것은 '반성이 전제된 독립'의 과정이지, 이혼을 훈장처럼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혼은 힘든 과정이기 때문에, 주변의 지인들은 이혼한 이를 응원하는 마음에 '그래 잘 이혼했다.' 정도의 말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혼을 '어떤 성취의 달성'으로 볼 수는 없다. 이혼은 그냥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도 끝이 좋지 않으면 용두사미에 불과한 그런 보잘 것 없는 시작인 경우가 대부분이란 말이다. 

가끔 연예인들이 이혼에 대한 담담한 자기 생각을 말하는 프로그램들은 분명히 참고가 된다. 일부 연예인들이 이혼 뒤에 자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들인 노력을 보면, 나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경험도 한다. 하지만 그걸 티비로 보는 사람들은 그냥 이혼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결혼도 이혼도 아이 양육도 저 먼 나라 다른 사람의 얘기니까, 이혼도 그냥 연예인이 만들어내는 가십거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연예인과 유명인의 삶은 그렇게 함부로 소비되어도 좋은 것인가. 

이렇게 이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내가 경계하는 이유는, 그것이 조금만 밀면 남성주의와 여성주의로 빠지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둘 다 무리지어 나를 보호하는 전략이다. 내가 이혼을 경험했다고 상처받은 사람들 사이로 모이려는 행동이 과연 이혼으로 자기주도권을 오랜만에 되찾은 사람이 하는 일인가. 그건 그냥 자기주도권을 이혼한 남성 혹은 여성 커뮤니티에 다시 내어 맡기는 바보같은 짓이다. 그런 커뮤니티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팔아먹는 '작가'나 '전문가'들이 많다. 위로받고 싶은가. 이혼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싶은가. 돌싱들사이에서 누군가 만나서 다시 잘해보고 싶은가.

아니다. 이혼한 당신은 오롯이 홀로 서기 전에는 위로받을 자격이 없다. 이혼은 분명히 당신 스스로의 잘못이었고, 이혼은 당신 탓이다. 이혼한 이후에 이혼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책임도 당신에게 있다. 저 놈 혹은 저 년 때문에 이혼을 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혼을 겪고 독하게 독립을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데나 기웃거리고 있다면 한심한 일이다. 먹고 살만 한가보지? 페미니즘이나 매노스피어 (Manosphere)는 당신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집단지성따위에 의존하지 말아라. 얼마나 추레한가. 전배우자를 욕하는 것도 모자라, 남성이나 여성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정부는 당신의 노후를 책임지지 않는다. 잘해야 아이를 키울 때까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이혼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치장하기 전에, 실패한 결혼이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어려운가?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잘 알고 있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어느 잘 나가는 연예인 커플이 이혼 이후에 재결합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돌싱이지만 어느 남자나 어느 여자가 짠 하고 나타나 나와 알콩달콩사는 상상, 그 상상이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한 보수공사를 충분히 하고 있는가. 그 보수공사가 제대로 끝나기 전에 누군가를 다시 만나면, 당신은 결국 같은 돈 문제와, 같은 성격 차이, 같은 고부-장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 스스로를 완성하기는 어려워도 성장할 수는 있다. 이혼은 사람을 성장시키지 않는다. 이혼 이후의 반성과 자기교정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혼 이후 성장의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때까지 이혼한 당신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자격도 없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혼에 당면한 사람을 불타는 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 비유했었다. 분명히 불에 탄 집의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집에 불이 난 것, 혹은 집에 불을 지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독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생각'이 전혀 아니다. 왜 불이 났는지 (왜 나는 혹은 전배우자가 그 불을 질렀는지) 원인을 파악하고 재발방지를 해야 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나가는데, 화재를 자랑거리로 삼는 것은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고, 이건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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