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인문학에 대한 오해와 전공으로 밥벌이를 해야한다는 강박 (이혼남 아빠가 자식들에게)

싱글맨 2023. 7. 1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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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출신이다. 그게 무슨 훈장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귀에 들리는 푸념에 문과, 이과 구분과 돈벌이에 대해서 한 마디 적고 가야겠다. '30대 문과 연봉 현실' 같은 수준 떨어지는 소리를 안 들을 방법은 없겠지만, 애들 교육 생각해서 기록해둔다. 문과 졸업생이 취업 시장에서 불리한 현실을 두고, 인문학이 홀대 받는 다는 댓글이 흘러나온다. 문과 졸업을 한 것은 인문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두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인문학에 대한 오해, 그리고 둘째, 전공으로 밥벌이를 해야한다는 생각. 

인문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1. '인문학'에 대한 오해

전 세계의 이공계와 예체능 계열이 아닌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계열 학문과 사회계열 학문은 인문학이 아니다. 외국어나, 정치학, 사회학을 배웠는지는 몰라도 그건 그 특정 분야의 학문이지 우리가 말하는 소위 '인문학'은 아니다. 2년에서 4년을 그런 학과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인문학'을 제대로 배운 것은 아니다.  

흔히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퉁쳐서 부르는 '학문'은 논리적 의견 개진과 설득, 리더십, 낯선 환경에서의 적응력과 근본적인 문제 해결 능력, 문제 해결의 방법론, 말하는 방법, 글을 쓰는 방법등을 포함한다. 요약하자면, 제왕학이다.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란 말이다. 경영대학에서 마케팅이나 리더십 수업을 듣고, 문예창작과에서 글 쓰는 방법을 배웠다고해서 제왕학을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인문학은 '칼 끝을 어디로 행할 것인가' 에 대한 생각이다. 칼로 누굴 찌를 것인지, 아니면 칼을 칼자루에 넣어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제왕학의 끝판왕은 그래서 '의사결정'이다. 

최근 20년간 문과 졸업생이 취업시장에서 인기가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칼도 없으면서 칼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혼자 빠르게 달릴 줄도 모르면서 (감히) 함께 멀리가려 하기 때문이다. 경제학과가 그나마 상황이 나은 이유는 Econometrics라는 수학/통계학과 접목된 분야가 현대 금융의 Quant 분야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지한 학생들은 '칼'을 준비할 기회를 얻으니까. 문학, 심리학, 정치학, 역사학 같은 분야들은 전부 중요한 학문이고 필요하지만, 그걸 전공했다고 어떤 툴을 갖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과와 문과를 구분하면서부터 한국 교육은 시작부터 시궁창에서 썩기 시작했다. 별로 효과적이지도 않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에 불과한 제도를 5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교육부 관련 공무원들과 선생들도 '인문학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생산력과 물리력을 갖춘 주체가 의사결정을 한다. 원래부터 문과 이과 같은 구분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의 현상도 나타난다. 개발자와 연구자로 가득 차 있는 능력있는 조직에서도 의사결정을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 말이다. (대개의 직장인들은 이 현상을 볼 기회도 없겠지만)

문과 출신 졸업자들을 폄하할 일도 없다. 이미 고시나 변호사 시험, 변리사, 회계사 시험을 통과했거나 외국어를 미친 듯이 잘하거나, 아니면 생산직이나 사업에 도전해서 성공한 경우, 문제 없이 살고 있다. 그런 예가 적을 수는 있어도 분명히 있고, 각자의 돈벌이가 다를 순 있어도 자기 생활이 안 되진 않는다. 

2. 전공으로 밥벌이를 해야한다는 강박

대학을 나오고 취업을 해서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 70년대 이후 50년간 자리잡으면서 생긴 오해이다. 원래 전공과 돈벌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말을 이상하게 듣는 사람들이 '대학은 돈벌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덜 이상하게 듣는 경향도 있다. 여기서 스티브 잡스의 케이스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진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방법은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가능하다. 자산이나 돈을 벌어내는 시스템에 대한 소유권에서 돈이 벌린단 말이다. 어떤 학문을 전공했는지는 내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자식 교육에 신경을 쓰고, 학벌을 챙기는 것은 그만큼의 문화자본을 가지고 집안을 가문으로 만들기 위함이지, 전공한 학문에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클래스가 다른 부를 가지고 있는 집안에서 자식을 의대에 보낸다면, 그건 의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병원을 차리기 위한 것이다. 차이를 알겠는가. 그렇게 의사가 된 사람의 목표는 몇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지가 아니라, 몇 명의 의사를 고용했는지에 있다. 

자산이 있는 예술가는 평생 예술에 몸담고 살 수 있다. 연예인들이 부동산 투자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지탄의 대상이 아니다. 자산이 없는 예술가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큰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두 경우 모두 본인의 예술 창작 활동에 진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굉장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전공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을 하니, 반드시 이공계로 진학하거나 의대, 수의대, 치대나 법대를 가야한다. 이런 '좁은' 구분에 따르면 방금 언급한 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를 진학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특히나 학자금 대출까지 받는다면 더더욱.

어치피 세상을 살려면 나에게 집중하되 세상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내가 그것을 제공하는 것, 이것 말고 아무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미스터리란 없다. 내가 가치 있는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내가 어느 학교 어느 학과에서 시간낭비를 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결론:

사람들이 전공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조건 직장인이 되려고 하기 떄문이다. 고용되려고 할 뿐, 고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후자의 길이 쉽다고는 안했다. 문제는 '의사결정의 인문학'은 고용하려는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의사결정을 할 자격과 경험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처음부터 '기획' 같은 걸 하려고 하면서 고용되려고 하니 취업이 안 되는 것이다. 남의 돈 받아서 생계를 해결하면서 칼자루 쥐고 흔드는 시늉을 하며 자기가 있는 폼 다 잡겠다고?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게 아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자식들은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전공과 생계를 상관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아빠가 이과를 전공으로 선택하라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전공과 관계없이 이과, 문과의 학문을 둘 다 갖춰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래야 주인으로 살 수 있다. 

니들은 아직 어리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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