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헤어질 결심, 죽음과 핑계

싱글맨 2022. 7. 1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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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혼자 죽는다. 이 법칙에는 예외가 없다. 평생의 반려자가 옆에 있다고 없는 예외가 허용되진 않는다. 백년해로한 부부가 한날 한시에 죽어도 그들의 죽음은 각각이다. 각자의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슬퍼할 수는 있지만.

옆에 죽음을 슬퍼해주는 누군가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될까. 삶의 영수증은 오직 나의 것이다. 자기의 부끄럽지 않은 삶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인간의 죽음은 하찮은 일이다. 인간의 생명이 가벼우니 가볍게 생각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의 죽음이 흔한 일상이라는 의미다. 도처에 안타까운 죽음들이 많다. 하지만 누군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자들의 짐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죽음 이후의 후속조치를 할 수밖에 없다. 반려자가 있을 때 바뀌는 것은 살아서의 생활이지, 죽어서의 기억이 아니다. 그 죽음의 기억을 가진 자도 죽는다. 나도 내 아이들이 나를 기억하길 원한다. 부질없는 욕심인 것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버리질 못하겠다. 

이혼을 소재로 한 블로그에서 왜 죽음을 말할까. 이혼을 죽음의 경계에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도 결혼생활중에서 깊이 남은 상처 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설익은 생각으로 결혼을 감항하고, 너무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혼자 죽기 싫다는 것을, 죽어서 혼자 이름없이 묻히기 싫다는 걸 이유 중의 하나로 '걍' 결혼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별거의 시작을 심정지로 시작했다. 그 경험은 내 목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을 만나지도 않았고, 지난 인생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지도 않았다. 유체이탈을 겪지도 않았고, 갑자기 도가 터 행복을 위해 자연속에서 사는 극적인 경험도 없었다. 그런 경험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겪었든, 나는 그런 것이 죽음을 미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죽음과 컴퓨터가 꺼지는 것은 다르지 않다. 다만, 재부팅된 내 몸과 마음에 차가운 분노가 장전되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중환자실에서 목에 호스를 꽂은 채 깨어나, 나는 아버지를 기억해냈다. 한참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뜬지 얼마 안되었을 때라, 티비에서 나오는 췌장암에 대한 특집 뉴스를 뭔가 이상함을 느껴 방문했던 병원 대기실에서 시청했다. (나는 그 때 짐작이 갔다.) 췌장암 말기의 마지막 다섯 달 동안 당신을 괴롭힌 것은 암의 고통이지만, 가장 불편해하셨던 것은 죄책감이었다. 나이 든 아내와 아들에게 대소변을 받아내게 해야한다는 것을 무척이나 치욕스럽게 생각하셨다.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아들인 내게 하는 말은 단 하나,

'미안하다.'

약점을 아들에게 보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책임이 남은 가족에게 주어질지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은퇴 이후 너무 죽음과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그걸 다 아는 나는 과연 나의 아이들이 나의 임종을 지키기를 원하는가.

중환자실에 배우자의 자격으로 들어온 당시 '아내'를 보고 이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병상에 있는 내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이상, 나의 의료 정보와 가장 치명적인 약점들을 드러내게 된다. 이대로 죽으면 나의 주도권이 전부 '전처' 가 되었어야 할 '배우자'에게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혼은 상수가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대단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죽음을 지켜야할 만큼 대단한 사람은 역사상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잘난 정규 분포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독자의 95%는 그저 그런 삶을 살다가 간다. 그런데 왜 반려자를 굳이 어떻게든 남겨 당신의 죽음이 외롭지 않으려고 하고, 2세를 겟하거나 재회를 통해 식어 가는 가정을 억지로 지키려고 하는가. 혼자 죽기 외로워서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육아는 이혼을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 맘 같아선 이혼을 열 두 번 넘게 했을 것이다. 이혼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냥 이혼할 돈이 없는 것은 아니냔 말이다. 아직 스스로의 치부를 마주하고 살아갈 준비되지 않았으니 뭉개고 있는 것 아닌가. 죽음과 외로움을 탓하지 마라. 결혼 생활 내내 당신은 이미 충분히 외롭다. (아직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긴 하다. 나도 죽음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이혼을 결행할 '단호한 결의'라는 것이 생겼으니까. 독자인 당신의 '선'은 무엇인가.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외로움일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여 '당신'이라고 칭하면서 독설을 뱉는 것 같은가. 그렇다, 내가 주제 파악도 못하고 지나친 글을 썼다. 확실한 것만 다시 정서하자. 나는 죽음에 민감해졌고, 남의 만남과 이별에 둔감해졌다. 나는 한계가 많은 인간이다. 나나 당신이나 산 정상에서 추락해 죽는 사람이지,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덧) 아이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내게 달렸다.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똑똑히 기억한다. 숨을 거두었음에도, 당신의 눈꺼풀은 내가 손으로 쓸어내린다고 곱게 덮히지 않았다. 마지막 즈음에 내뱉은 '허무하다'는 말과 같이 미련이 남은 것처럼 눈은 계속 다시 뜨여 저 먼 곳을 응시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의 기억 중에서 내게 의미 있는 것은 임종의 순간이 아니라, 캐치볼을 했던 것, 택시 안에서 토한 나를 일으키고, 택시기사 아저씨의 빨래를 옮기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던 아버지, 직장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떠벌이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행적이지, 마지막 순간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처음부터 아빠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아이들을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나머지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이혼 전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아이들은 필요한 부분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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