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아들에게

살아남아야 삶이 있다.

싱글맨 2021. 8. 1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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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에게

어제는 13년 전, 아빠가 입대한 날이다. 모든 걸 약속해줄 것 같았던 대학생의 이미지가 텅 빈 허상이란 걸 알게 되고 나서 미련 없이 전투화를 신었다. 여전히 아빠는 불완전하고 미숙한 인간이지만,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앞가림을 하고 생활해 나갈 수 있는 것도 그 날 덕분이다. (군대가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아니라, 그저 눈 앞의 현실로 돌아왔기 때문이란다.) 

오늘 만나고 온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3년 째, 영문을 모르고 했겠지만 산소에 가서 인사하던 네 모습에 잠시나마 마음이 편안했단다. 당신께서도 역시 불완전하고 미숙한 인간이었지만, 역시 아슬아슬하게 전쟁으로 시작한 생을 살아내셨다. 당장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엔 알게 되겠지.  

아빠는 할아버지께 대들듯이 반문한 적이 있단다. '생존이 당신 목표의 전부입니까?' 라고 물었고, 지금 생각해도 그 질문은 유효한 질문이었단다. 당신께서는 얼버무리셨고, 즉답을 듣지는 못했다. 유난히 당신의 얼굴이 슬퍼보였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생이라 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2000년대 초반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진짜 대답은 3년전 오늘 들었단다. 말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생존이 담보되지 않은 목표나 꿈, 이상은 텅빈 것이다.  


아빠가 어린 네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2016년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남자는 79세 정도라지. 그게 의미가 있을까. 평균은 평균일 뿐, 누구나 한국인 남자라면 79세까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걸 할아버지께서는 보여주셨단다. 

아빠가 했던 질문에 뜨끔하셨는지 퇴직이후의 생활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할아버지는 많은 일을 하셨단다. 새 일도 찾으려고 하시고, 30년간 안 했던 설거지를 하고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보시고, 틀어진 자식들과의 관계를 나름 복원해보려고 하고, 원예와 신앙 생활을 새로 시작하기도 하셨다. 99세 시대라며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당신께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했었다. 섣부르게 지인을 믿고 투자했다가 6억에 가까운 돈을 날렸고, 그렇게 퇴직 후 5년이 지나 돌아가셨다. 

아빠는 매일 새벽 출근하면서 그게 너를 보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단다. 슬픈 일이지만 통계적으로 가능한 일이구나. 

할아버지 세대가 겪은 전쟁과 현대화의 시대보다 앞으로 네가 살 세상이 더 안전하다거나 더 합리적인 세상이 될거라는 보장은 미안하지만 없다. 여전히 지은지 30년이 넘은 아파트의 12층 유리창이 보도 위로 떨어지고, 술 쳐먹은 아래층 새끼가 술병을 깨며 난동을 부리며, 대로변에서 이유 없이 사람이 죽어가는 세상, 아빠가 입대했을 때무터 지금까지 군복과 교복을 입고 이유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라 아빠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단다. 네가 파란 하늘 아래 산소에서 팔랑거리며 걷던 때에 아빠는 딱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아버지 당신이 맞았습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는 거군요.' 


꿈을 펼치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의 딸아 살아남아라.

생존에 성공해야 삶이 있다.

P.S. 아들아, 이 글은 네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누나가 겨우 걷기 시작했을 때 쓴 글이라 네가 수신인에서 빠졌다. 그러나 이 말은 네게도 똑같이 적용된단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네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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