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는 것은, 말해야 할 것이 무겁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사회적 관계나 평판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도움도 되지 않는 말들, 나중에라도 이걸 애들한테 어떻게 가르쳐야, 아니 가르치는 게 맞는지 그것부터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 때문에 침묵을 하게 되고, 유난히 오늘따라 그 침묵의 무게가 아주 무겁게 느껴진다.
진실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들 진실을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 즉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 특히 자기 상상이 만들어내어 각색된 서사를 원한다.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직장이든, 다 마찬가지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을 말할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낫다. 하지만 침묵은 칼집 없는 칼처럼, 몸 안에서만 날을 세우고 나를 베어낸다.
아이들에게는 더 가혹하다. “아빠, 왜?”라는 질문이 언젠가 나올 걸 안다. 애초에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선택지는 나에게 없다. 사회적 체면 같은 현실적 족쇄가 이미 진실의 절반 이상을 봉인해버렸다. 그렇다고 거짓을 가르칠 수도 없다. 결국 남는 건 침묵인데,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대답이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도 아이들을 상처 입히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 무겁다.
나도 네 진짜 모습을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지 몰랐다.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예상이 맞았기 때문에 문제다. 이혼 이후 아이들을 제외하면 잠시나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실체를 알게 되는 일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다. 익숙한 눈과 어깨선을 보면 그저 슬플 뿐이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12년전쯤 했던가…세상이 바뀌어 똑같은 일을 절반쯤 온라인으로 겪었을 뿐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왜 나만 이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가? 결혼이란 제도, 가정이란 울타리, 도덕이란 이름은 결국 책임을 더 많이 떠안은 사람에게만 족쇄가 된다. 다른 한쪽은 가볍게 떠나가 버려도, 남은 사람은 끝내 무게와 함께 살아야 한다.”이러한 생각은 틀렸다. 모든 사람이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한다. 다만 그 무게를 공평하게 나누지 않을 뿐이다. 입 다물고 살면 ‘착한 아빠’고, 한마디라도 진실을 흘리면 ‘비열한 남자’가 된다. 이 얼마나 비겁한 규칙인가를 따지루것이 아니라 이 게임에서 어떻게 이겨서 빠져나갈 지가 문제다.
그래서 한 구석에라도 기록해둬야 한다. 이 무게가 나만의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 내가 분명히 짊어지고 있다는 증언 말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이 글을 읽게 되더라도 좋다. 아빠는 끝까지 침묵을 지키려 했지만, 동시에 침묵에 짓눌려 부서져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는 흔적을 남겨주고 싶다.
침묵은 보호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의 다른 이름이다. 다만 총 대신 말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 안에서 나는 매일 싸운다. 그리고 매일 진다. 하지만 진 사람도 기록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오늘은 그 권리를 행사한다. 침묵이 무겁다는 사실, 그리고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적어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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