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아빠가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너희들도 나이가 들면 고민해보길 바란다. 너희들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 세상은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곳이 아니라, 너희들의 쓸모를 다하면서 사는 곳이다. 너희들의 "Necessity"가 무엇인지를 알고 사는 동안에만 거기서 너희가 주체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아빠는 무슨 종교적인 얘기를 하는게 아니다. 세상을 사는 것이 나나 너희들이 마음대로할 수 없는 주어진 환경에 대응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빠는 10대일 때 9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살아왔다. 너희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2020년대의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동시대를 살더라도, 너희들이 예멘이나 마다가스카르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똑같은 서울이라는 곳에서 살아도 아빠나 엄마와는 다른 시점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특히 아들아, 이제 네가 학교에 들어가는 해이기 때문에 더 이런 얘기를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골라내는 능력을 가졌다.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고, 세상이 별로 즐겁지는 않단다. 요새 아빠가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살이 자체가 다분히 이분법적이라는 말이다. 너무 어려운가?
아빠가 사는 세상은 흑백이 정해져 있다. 흑백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살고 죽는 것을 말한다. 아빠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살아남거나 죽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빠가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걸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빠는 저 멀리 다가오는 쓰나미가, 가끔 아주 가끔은 남들보다 조금 먼저 보인다. 흐리고 추운 날, 저 파고를 넘기 위해 어디로 피할 것이냐. 아빠가 생사를 결정하지 않지만, 저 쓰나미가 지나가고 나면 살아남는 것은 무엇이냐?
아빠가 살면서 한국의 어지간한 시스템의 문이라는 문은 전부 닫고 다니며 살아왔다. 모든 학교와 시험 시스템은 아빠가 마지막이었고, 아빠는 항상 마지막까지 기다려서 살아남는 사람이었다. 그 뒤에는 항상 아빠가 적응하기 힘든 새로운 습관들이 있었다. 아마 너희들과 세상에서 함께하는 시간도 그러할 것 같다.
너희들이 사는 시기는 아마도 너희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100년 현대사를 통틀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너희들이 나이가 들어 만약 손주들이 생긴다면, 그 세대는 아빠와 너희가 함께 산 시기를 또 다른 혁명의 시기로 부를 것이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예보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좁지만 버틸 수 있는 조각배를 띄우는 일이다. 아빠가 뭔가를 살리고 죽일 수는 없어도, 이 배에 누굴 태우고 뭘 화물로 적재할지는 결정할 수 있다.
아빠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뷰는 이게 전부다. 너희가 어른이 되었을 다음 세상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일은 아빠의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런 능력이 나에게 없고, 지금 아빠가 하려는 일도 실패할 수도 있다.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안다. 너희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기를 희망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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