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이혼한 아빠의 직업이 뭔지 궁금해요

사랑하는 나의 딸과 아들에게,

아빠는 무얼하는 사람인지 너희들이 궁금해서 묻는 경우도 있었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조사를 하기 때문에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질문이다. 아빠는 뭘 하는 사람일까. 간단한 답은 있다. 아빠는 지금 회사원이다. 회사의 이름을 말하면 해결되는 일이지, 그리고 그 회사에서 아빠가 하는 일을 설명해주면 된다. 쉽고 원론적인 대답이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대답은 아니다.)

한국어로 다 '일 혹은 직업'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아빠의 Job, Career, Profession, Calling, Mission은 전부 다른 뜻이다. 너희가 아빠한테 물었을 때, 아빠의 어떤 것을 물어본걸까. 좀 어려운 얘기다만.

물론, 이제 너희들이 그런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뿌듯한 일이다. 

일단 아빠는 지금 회사원이다. 그리고 회사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다. 회사라는 것은 단순하다.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한다. 아빠는 그 일의 어떤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아빠가 하는 일의 전부일까. 

2023년 9월 1일, 아빠는 아빠가 지난 14년 동안 했던 일을 그만두었다. 

아직 아빠는 회사 소속이지만, 이제 더 이상 지난 14년 동안 했던 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이제 아빠가 해온 일은 더 이상 인간의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쓸모 없는 일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사람이 해야할 일은 이제 1차적으로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일이고, 무수한 데이터의 빈틈을 찾는 일이 되었다. 

아빠가 그랬듯, 이 일을 하기 위해 학위가 필요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대학원생 후배들이 있지만, 솔직히 난 그들이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게 필요없는 일이 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너무 낡은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가는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딸아, 네게 설명했던 아빠가 하는 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걸 사람이 하는 건 너무 소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개념이 아직 어려울 수 있고, 네가 아직 아빠가 하는 일에 대해서 충분히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아, 더 깊은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아빠는 아빠가 해왔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틀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이 끝나면 아빠는 더 이상 이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다. 아빠는 알고 있단다, 아빠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앞으로 2년 정도 정말 잘 해낸다면, 아빠가 하는 일은 정말 손꼽을 만한 실력의 소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빠의 Job과 Profession에 해당하는 범위의 일이다. 만약 그걸 아는 아빠가 그 일이 끝난 뒤에도 이 회사에 남아 있는다면, 아빠는 비겁한 사람이겠지.

아빠의 Mission은 그럼 뭘까. (Calling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별도의 글에서 적으마.)

네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한국전쟁중에 잃었다. 너희에게 한국전쟁에 대해서 설명해줄 날이 올 것이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아빠를 본 적이 없다. 네 할아버지의 역할은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 시기를 살아내어 집과 차가 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서민 생활수준을 만드는 것까지였다. 너희들 할아버지의 수명이 그 이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빠의 미션은 그것보다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네 할아버지가 벗어나지 못했던 산업화 시절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 자식들과 사회가 원하는 삶에서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현대사회에서 증명하는 것, 그것이 아빠가 해야할 일이다. 가끔 아빠에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들에게 돈과 전쟁에 대한 얘기를 할 필요가 있느냐고. 글쎄, 아빠는 너희들에게 그 얘기를 최대한 많이 해줄 요량이다. 

안타까운 일일 수는 있으나, 세상의 흑백 논리를 빨리 인정하길 바란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있는 것이 세상이다.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당하지도 않는 포지션은 이 세상에는 없다. 너희들에겐 상처지만, 너희들의 엄마를 떠난 것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아빠의 첫걸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너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