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혼자 피를 닦아내는 일은 영구적인 일상이다. (feat. 이혼남에게 필요한 생활 잡학 지식)

싱글맨 2024. 12. 3.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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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흘린다. 먹는 일도 귀찮고, 잠을 이룰 수 없는 정도가 지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이혼남으로서 혼자 산다는 것은 항상 혼자 피를 흘리는 일이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혼자 살아남는 것은 여기서 시작한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비롯한 일련의 검사를 치른다. 이 비용을 지불하고, 붕대를 풀었다가 다시 묶고, 다리를 거꾸로 들어올린다. 화장실 청소, 방 청소, 쓰레기를 버리고, 다시 일터로 나서는 일상이 외롭다거나, 쓸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혼 이후에 혼자 살 수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다시 전장에 나서야 한다. 샤워기를 청소하고, 줄눈을 채워넣고, 칫솔을 바꾸고, 신발 세탁을 의뢰하는 일상부터, 아이들을 만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까지 다 한꺼번에 해내야 하는 일이다. 11월에 폭설이 쏟아져도 이 일상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이혼남의 숙명과 같은 일이다. 이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순간, 약해진다. 어떤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유치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내기 위해 협업하는 것과 일상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의 임원 인사를 잘 지켜보면서 내 업무를 완수하면서도, 시장의 상황에 따라 내가 다니는 회사의 주식에 숏을 쳐야하는 일이 일상인 상황에서 내 생활과 감정의 영역에 누구를 들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독립의 기술은 대학생일 때 배워야 했다. 이혼 직후에라도 나머지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배워두는 것이 좋다. 개인 위생과 간단한 자동차 정비 같은 자잘하지만 필요한 손기술을 배워두는 것이 생각보다 아주 절실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세대에서 마누라가 없으면 밥도 못 먹는 한심한 인간들을 나는 전처보다 경멸한다. 자기만의 식사 루틴과 요리 레서피시피 정도는 있어야 한다. 

여기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건강에 대한 지식이다. 내 혈당, 혈압, 콜레스테롤 수치와 간 수치 정도는 대략적인 수치를 외우고 있으면서 자기 몸을 끊임없이 관찰해야 한다. 여기에 맞춰 자기 생활 습관을 교정해나가고, 운동과 식단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주의를 집중해서 3개월만 해도, 내 몸 상태와 나의 습관을 통해 스스로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통돌이 세탁기와 드럼 세탁기의 차이점, 각자의 장단점, 세탁기 청소 방법은? 칫솔을 쓰는 방법은? 칫솔을 보관하는 방법은? 효과적인 난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보일러의 온수 세팅을 다르게 하거나, 보일러 에러 메세지를 보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나? 전기 차단기는 어떻게 작동하고, 아파트에서는 어떻게 세팅이 되어 있는지? 언제 결로가 생기고 곰팡이 발생의 위험성이 있는지? 화장실에 생기는 물때는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걸 직접 해결하면서 필요한 지식을 쌓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이혼남은 여자친구나 재혼의 여부와 관계없이, 영화 캐스트 어웨이 (Cast Away)에 나오는 척 놀란드 (톰 행크스 분)와 같다. 척 놀란드와 실제 상황의 이혼남이 다른 점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이혼남에게 '윌슨'은 있어도 '켈리'는 없다. 설령 이혼 후 재혼을 한다고 해도 '내가 돌아갈 여자' 따위는 없고, 어떤 여자든 당신과 다시 '불타는 사랑'을 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건 이혼남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살아남은 이혼남에게 생겨버린 더 예민한 생존본능 때문이다. 그 무인도가 이혼남의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이 섬이 무인도라는 점에 감사하게 되었다. 

10월 초순, 월동준비를 시작하면서 직주근접이 가능한 단기 임대 공간을 빌린 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다. 유류비를 1/3 수준으로 줄이면서 내 몸을 다시 돌볼 수 있었고, 융통성 있게 출퇴근을 하면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진행하던 업무의 클라우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었다. 11월 중순까지 이 프로젝트의 실패를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성공'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서울에서 출퇴근 하는 종전의 일상을 반복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다. 이동을 결정할 무렵부터 나는 몸에 이상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에 올인하기 위해 가까운 거처를 알아보았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공간은 내가 허물을 벗어내는 공간이 되었다. 망가진 몸을 관리하면서, 프로젝트까지 마무리지을 수 있는 나만의 동굴을 찾은 것이다. 

이제는 이 동굴을 나갈 차례다. 다시 봄이 오면, 다시 싸움은 시작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전쟁터가 서울이 될 것이다. 석달 후면 다시 불의 산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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