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남이 러시아어를 배우는 이유 (왜 적성국, 분쟁 지역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가.)
외국어로서 영어의 필요성을 굳이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모든 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영어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것은 혼자 석기시대에서 살겠다는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과 글을 통한 기본적인 영어 의사소통은 한국어와 함께 그냥 기본이다. 영어를 좀 할 줄 안다는 것이 특별한 기술이 있다고 보는 시대는 진작에 끝장이 났다.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면서 말과 글을 대학 수준 이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제 문해력의 문제가 되었다.
외국어 습득에 관한 몇 가지 오해들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생성형 AI와 구글 동시 통역 같은 기술이 있으니 이제 더 이상 외국어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믿고 살아라. 별로 설득할만한 가치를 못 느낀다. 영어 억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려진 오해이다. 억양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에 따라 미국인/영국인 혹은 계층간의 억양을 구분하여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입을 뗴는 순간 억양에 따라 사람의 첫 인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인 억양이 남아 있어도 일관성 있는 발음만 할 수 있다면 영어로 의사 소통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고, 딱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 딱 하나의 문제는 그 억양이 청자가 화자를 한국 출신 외국인 노동자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건 화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관점으로는, 아직도 나의 영어 학습이 끝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신 있게 미국식 영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아직도 filler word를 많이 사용하고 여전히 어휘가 다채롭지 못하다는 점은 개선이 필요하고, 영국식 억양을 계층별로 코드 스위칭해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
미국이 더 이상 두 곳 이상의 군사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은 이제 영어 이외에도 제2외국어를 배울 필요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영어의 우위는 어지간해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존의 지식이 영어로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위가 흔들릴 일은 거의 없다.)
개인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중이다. 아랍어는 글자를 익히는 수준으로 가볍게 공부를 시작만 해두었다. 외국어 공부의 흐름은 분쟁 지역을 따라간다. 그리고 당연히 언어의 습득은 역사 공부와 함께 간다.
왜 '적성국'의 언어와 '분쟁 지역'의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그 지역이 실제로적이 되거나 아니면 기회가 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외국어 습득은 원래 군사정보 Military Intelligence (MI) 병과가 그 기원이고, 전 세계에서 언어를 가장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취준생도, 해당 지역 관련 학자도 아니다. 미군 정보병과 Linguist를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 가장 혹독한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다. 분쟁이 지속되면 지속되는대로 해당 언어에 대한 수요가 있지만, 분쟁이 끝나거나 완화되기만해도 급속하게 기회가 열릴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비롯한 주변 4강의 언어에 정통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이렇게 전 세계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국가를 두고도 외국어 학습에 여유가 넘치는 사람들을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이건 스스로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기도 하다. 다들 집안에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격리 시절을 보내면서도 러시아어를 일정한 수준에 올려 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영어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지도 않았다. 지난 4년, 한 언어에 2년씩 투입해서 결과를 냈어야 했다. 일본어를 제외하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는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화자가 확보되어 있는 유엔 공식 언어이기도 하다.
오는 9월 나는 러시아어 OPIc에 응시하기로 되어 있다. 시험 성적을 내게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내가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45세가 되기 전에 일본어와 중국어까지는 커버를 할 생각이다. 아마도 내게는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언어를 한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실제로 그 언어를 써서 뭔가를 해야 한다. 사람을 사귀든 물건을 팔든, 새로운 전문 분야를 개척하든 뭔가 결과를 내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전쟁으로 러시아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면 기회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