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남 출근룩, 어떻게 입을 것인가. (feat. 리바이스)
마스크를 끼고 출근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던 시절에는 입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집에서 제 시간에 나오는 것이 목적일 정도로 입는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나 자신을 돌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개의 경우 회색 반팔 티셔츠 몇 벌과 바지 두 개 정도를 돌려 입었고, 추우면 코트를 걸쳤다. 심지어 언제부턴가 티셔츠의 색상을 바꾸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티셔츠의 색상을 통일도 했었다. (IT 업계 특성상, 스티브 잡스의 터틀넥 유령이 떠도는 직장의 분위기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이제 그 반팔 티셔츠의 목이 다 늘어났고, 바지는 거듭된 세탁에 쫄아들어 레귤러 핏이 스키니가 되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도 바뀌었고, 임원회의에 출석하는 일이 잦아졌다. 교육과 출장, 파견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갑자기 일해야 하는 일도 많아졌다. 회사 밖에서 나를 위해 일하는 시간도 조금씩 늘어났다. 이제 더 이상 바지 하나사면 990원에 주는 무신사 티셔츠로 버티기 어려워졌다. 여기서부터 나의 투자가 시작되었다.
40대가 되면서 달라졌다. 내가 입고 먹고 쓰는 물건에 따라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본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드레스 코드는 두 가지 압력이 상존한다. 갖춰 입지 않았을 때의 곤란함과 갖추어 입었을 때의 압력이 상존한다. 점점 수평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는 조직 문화 변화 드라이브의 방향성 때문에, 갖춰입으면 동료들 사이에서 튀어보이는 것 때문에 생기는 시선의 압박이 오히려 더 강하다. 내가 뭔가 내 이미지를 챙기겠다고 갑자기 수트를 입고 출근을 할 수는 없다. 임원들도 수트를 입는 일이 극히 드물고, 부사장급 이상에서 넥타이를 착용하는 것도 거의 보지 못했다. 보급형 재킷 하나만 걸쳐도 오늘 어디 가냐는 질문이 나오는 직장에서,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입을 것인가.
일단 하의부터 손을 보기로 했다. 신발과 바지를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으로 구매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했다. (신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 별도의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한다.) 애매하게 발등에 걸리는, 끝이 조금 헤어진 와이드핏 면바지를 손보지 않고 다른 것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바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데님의 대명사이고, 501핏이라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으리라는 생각했다. 다리의 길이와 두께가 있기 떄문에 슬림핏이나 테이퍼드 핏을 선택하기 어려웠다. 내 문제는 항상 종아리에서 시작한다. 브랜드마다 다르지만 대개 34-36에서 맞는다. 문제는 허리에 맞는 것을 입으려고 해도 종아리에서 걸리는 튼실한 하체에서 발생한다. (운동을 해도 꼭 살은 안 빠지고 종아리에 근육이 붙는다.)
테이퍼드 핏을 한 사이즈 크게 입어도 종아리가 스키니 진의 핏이 되어 버리는 문제는 결국 다른 핏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501 핏은 클래식한 스트레이트 핏이고, 505 모델은 501의 핏을 유지한 레귤러 핏에 501의 특징인 버튼 플라이를 지퍼로 대체한 모델이라 가장 안전하고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느꼈다. 확실히 이미 보유한 테이퍼드 핏 데님보다는 훨씬 여유롭게 맞는다. 청바지를 입었다고 꾸며 입었음을 사갈시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셔츠만 깔끔하게 입으면 과한 캐주얼이라는 인상도 주지 않을 것이다.
화이트, 그레이 (워시드 블랙), 진청, 블랙까지 색상에 맞추어 리바이스 501, 505 모델을 여러벌 구매했다. 특히 화이트를 고른 것은 나름대로 과감한 선택이었다. 구매는 백화점이 아닌 아울렛을 이용했다. 마침 3, 4월 내내 파주나 김포의 어느 아울렛에 가도 2+1 행사를 하고 있었다. 평균 구매 단가를 따져보니 한 벌 당 8-9만원 사이에서 구매했다. 이렇게 나는 총 6벌의 데님 바지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이 바지에 신발을 맞추고, 셔츠를 선택함에 따라 출근룩이 바뀌게 될 것이다. 특별히 아주 신경썼다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더라도, 더이상 대학원생 같은 인상을 주지는 않고 싶었다. 구매한 데님들을 하나하나 다시 입어보고, 길이가 맞지 않는 바지들은 전부 수선을 맡겨 hemming을 했다. 바지 끝단 스티치가 복숭아뼈에 맞도록. 찢어진 청바지도 워싱이 과하지도 않고 끌리거나 짧지 않게. 무조건 깔끔하게. 내 이미지에 투자한다고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일제 복각 데님을 살 필요는 전혀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패션이 아니다. 기본적인 '복식'에 대한 지식과 때와 장소에 맞추어 옷을 입을 수 있는 '습관'이 필요하다.
어쩌면 40대에 이걸 다시 바로 잡고 있는 나는 너무 늦었다.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이다. 셔츠나 다른 아이템들은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하나씩 기본 아이템들을 챙겨 입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속옷에 반바지만 입고 집에 있다가 어제 입은 바지를 주워 입고 다시 출근길에 나서는 남편에게 전처가 매력을 느낄 수 있었을까. 나를 돌보지 않는 사소한 습관 하나가 나를 망치고 결혼생활을 망친다.
다 입은 바지를 벗어 바지 옷걸이에 걸어 분무기로 무릎에 물을 뿌리고 거꾸로 옷장에 걸어 놓는다. 데님이라 구겨짐이 심하지는 않지만,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을 수 없다. 예전에 미국에서 샀던 501 블랙은 너무 많은 세탁을 해서 물이 확 빠지면서 줄어들어 입을 수가 없다.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세탁을 꼭 필요할 때만 하고, 내 몸을 돌보듯 옷을 걸어놓는다.